2021. 11. 10. 07:33ㆍ누가복음강해
오늘 말씀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해 올라가기 직전에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9:37,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시니 큰 무리가 맞을새 무리 중의 한 사람이 소리 질러 내 아들을 돌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다" 누가는 왜 이튿날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이틀은 많은 시간입니다. 그 많은 시간 동안 산 밑에서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귀신 들린 외아들을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아버지란 사람이 얼마나 시끄럽게 굴었을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에게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꾸짖어십니다(41절). 이 표현은 출애굽 때 하나님이 믿지 못하고 부패한 광야 세대를 꾸짖을 대 사용하신 표현입니다(신 32:5). 그럼 예수님은 귀신을 물리치지 못한 제자들에게 이 표현을 했을까? 귀신을 물리치지 못했다고 믿음이 없고 패역하다고 했을까? 이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물리치는 사역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리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모르고 본절에 나오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귀신을 물리치고 병 고치는 의사 정도로 알았던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이들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렇게 소란이 일어났을까? 제자들이 귀신을 물리치지 못했다면 조용히 예수님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제자들 또한 예수님에게 권능을 받고 병고침과 귀신을 물리치는 능력으로 많은 사람들을 치유를 했으니까 당연히 자기들에게 이런 능력이 있는 줄 알고 그 소년에게 귀신을 물리치려고 했을 것입니다. 다음절의 내용으로 보아서는 제자들의 오만함을 지적하시는 말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두 번째 수난을 예고 하십니다.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44절). 그런데 제자들의 반응은 "그들이 이 말씀을 알지 못하니.. 또 그들은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45절). 제자들은 어렴풋이 예수님의 정체를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들이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로마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메시아로 알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독립을 하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인간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현재의 기독교인들도 똑같습니다. 다들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습니다. 성경은 분명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다스리는 나라라고 하는데도 교인들은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이 되고 죽어서는 천국에 간다는 생각으로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은 누가 큰자인지에 대해서 변론을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대답은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48절)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 어린아이는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약자였습니다. 그 당시 문화는 그가 만나는 사람에 의하여 그의 사회적 명예와 지위가 결정됩니다. 그러면 어린아이를 영접한다는 것은 사회적은 명예와 지위가 가장 낮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지위가 명예가 상승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 그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의 능력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들은 이런 능력을 가진 예수님은 분명히 예루살렘에 가서 큰 일을 행하실 분이라는 것을 확신했으니까~ 그래서 서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그들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은 3년을 따라다녀도 성령세례를 받기 전에는 무리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큰 자의 권위를 행사하고 싶었던 요한은 이런 말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49절),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50절). 요한은 자신과 열두 공동체가 큰 특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제자의 부르심을 섬김으로의 부르심이 아니라 특권과 권리로 이해를 했는 것입니다. 요한의 태도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어린 아이를 영접하라는 말씀과 완전히 대조되는 것이었습니다.
현재의 사역자들 또한 요한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어디 교단인지에 따라서 무시하고 어디 신학교 출신에 따라서 우열이 정해지고 우리 교단도 똑같습니다. 지방 대학에서는 장신대 신대원에 갈려고 특설반을 개설하고 교회에서도 담임목사를 청빙 할 때 특정 학교를 졸업을 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사역자를 선호하는 현실입니다.
이 모든 것이 특권의식이 아닌가? 우리 교회는 성도의 수준이 높으니까 이 정도의 목회자가 와야해~ 또한 정통교단에서 공부를 한 목회자는 군소교단에서 공부한 목회자를 깔보는 시대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보다 좋은 학교를 나오면 열등감에 사로잡히고 자기보다 못한 학교에서 신학공부를 했다면 깔보고 무시하는 우리들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어린아이를 영접하는 자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 아침에 생각을 해봅시다. 나는 요한과 같은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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