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사도행전강해]#20. 5:17-26

2022. 3. 2. 12:46사도행전강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두개파에 대해서 알려면 이스라엘 중간기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이들은 주전 168년 마카비 혁명 무렵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들은 헬레니즘 문화를 받아들였으며 진보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이들은 모세 오경만을 인정했기 때문에 내세를 믿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이후 주전 142년 하스몬 왕조 때 하스몬 왕이 대제사장을 겸직하고자 할 때 이를 반대한 바리새파와 대립관계로 놓이게 되고 사두개파는 이후 계속 하스몬 왕조에서 주전 142~76년 까지 권력 주변에 맴돌게 되고 바리새파는 탄압을 받게 됩니다. 이후 바리새파들이 주전 76~67년에 권력을 쟁취하고 하스몬 왕조의 알렉산드리아의 두 아들이 권력승계로 내분을 벌일 때 주전 63년까지 바리새파와 혈투를 벌였습니다. 결국 주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이두매인 헤롯 대왕이 정권을 잡으면서 진보주의자들인 사두개파는 권력 주변으로 민족주의 자면서 보수적인 바리새파는 민중속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이후 주전 55년에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 70명이 모인 사법기구인 산헤드린 공의회가 탄생합니다. 그리고 그 의장은 대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은 사두개인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민중의 지지를 중요시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1차 유대전쟁 전에 외국으로 모두 피신했습니다. 그러므로 1차 유대전쟁 이후에는 바리새인들만이 남게 되고 이스라엘 역사는 바리새인들이 이끌어 나가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90년에 얌마공의회를 개최하면서 지금의 구약 39장을 정경으로 채택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을 더 이상 회당에 출입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처럼 중간기 역사를 알아야지 신약 성경을 해석을 하는 데 있어서 좀 더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5:17~18,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도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이들에게는 성전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그들을 지켜주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 앞에서 사도들이 대놓고 성전을 무시하는 행위를 하니 그들이 사도들을 옥에 가둘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5:19-21,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은 베드로와 사도들은 옥에 끄집어내 주면서 바울은 왜 2년 동안 로마에서 옥살이하고 처형을 당했는데 왜 꺼내어주지 않았느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다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구속사에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면 천사가 말한 “생명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새로운 삶의 방식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함께 ‘가족’으로 사는 것, 재산에 대해 그리고 특히 거룩한 땅이 지닌 신성한 상징에 대해 근본적으로 새로운 태도를 지니는 것, 여전히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지만 각자 가정에서 예수님을 기억하고 그분께 기도하며 빵을 땔 때 하나님 앞에 자기 삶의 중심을 두는 것을 모두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생명 그 자체가 아주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났다는 의미의 ‘삶의 방식’입니다. 생명의 세력이 절대적인 죽음의 장벽을 뚫고 부패하고 타락한 현 세계 안으로 들어와 새로운 원칙,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 다 백성에게 말하라”는 요점은 사도들이 사는 방식과 그들이 행하는 치유에 근거를 둔 말씀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없는 상징은 아무리 강력하다 하더라도 이것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에 대해 다양한 해석에 놓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도들은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며 그것을 가르쳐야 하는 사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가르칠 것이 많았을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누구시고, 하나님은 그분을 통해 무슨 일을 하셨고, 그 일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의 긴 이야기의 정점이 되고, 또 오랫동안 기다려 온 하나님 나라에 관련해 그 의미는 무엇인지 등을 설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사도들에게 성령 세례를 받기까지 기다리라고 했습니다(1:4).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역은 성령의 역사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5:25-26, “사람이 와서 알리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성전 맡은 자가 부하들과 같이 가서 그들을 잡아 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더라” 이들은 왜 두려워했을까?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은 그들의 권력은 민중들의 지지에서 나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민중의 지지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것을 이해하면 마태복음 3: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를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같이 다닐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이렇게 세례 요한에게 온 것은 세례를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민중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대제사장들이나 성전을 지키는 이들이 민중을 무서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민중이 그들의 밥줄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라 할 만큼 성령의 역사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역은 성령의 역사함으로 하는 것이라고 사도행전은 끊임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이런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2,000년을 흘러오면서 다양한 시대 조류에 맞게끔 신학이 나오고 그 시대의 문화와 더불어 교회가 변하다 보니 가장 기초적인 것을 잊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실제로 우리 마음에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저 하나님은 저 멀리 관념적인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처럼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나의 삶을 간접 하시고 있다고 믿어야만 그다음의 일들을 진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을 간섭하신다고 믿지 않으면 모든 하나님의 사역은 나의 힘과 능력과 의지로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역이 얼마나 힘이 들겠으며 또 그 사역이 잘 된다 하더라도 그 영광을 하나님보다는 자기에게 돌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내 삶을 간섭하신다고 믿고 있는지를 한 번 점검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