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 12. 11:54ㆍ갈라디아서강해
오늘 본문에서는 율법을 감시인과 초등교사로 언급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지금까지는 율법을 소극적인 면에서 다루었지만, 이제는 적극적인 면에서 율법을 믿음이 오기까지 감시하고 양육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내용입니다.
3:23-25,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율법은 사람들을 엄중히 감시하며 감옥과 같은 곳에 가두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때 이전의 어두운 시대에 사람들이 죄를 범하지 않도록 감시함과 동시에 사람들의 죄를 드러내어 죄를 범하면 엄중하게 처벌하기 위함이었습니다(3:19). 이런 율법의 감시인 역할은 믿음이 계시될 때까지이며, 믿음의 때가 오면 중지되어야 하며 그 역할을 믿음에게로 인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율법에 대해 묘사하면서 이제 이스라엘이 성장할 때까지 보모(초등교사)였던 율법의 임무와 역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보모’(babysitter)는 바울 시대에 일반적으로 부모 대신 매일 아이들을 돌보는 임무를 맡았던 종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면 보모의 역할은 아이들이 자라면 끝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나름대로 감시하는 역할을 잘 수행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율법을 가르치거나 지킴으로써 자연히 또는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에게로 인도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기본 주장은 모세의 시대와 메시아의 초림 사이의 이스라엘 역사에 관한 것입니다. 이 기간에 이스라엘은 아직 어린아이였고 특별한 보살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린아이 시절에 보모가 필요했다고 해서, 성장한 뒤에도 보모가 계속 같은 일을 해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서신서 전체에서 주장하는 바는 메시아가 오심으로써 이스라엘은 책임감이나 신뢰성을 보일 나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뢰성’에 해당하는 단어가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믿음’이 성숙의 표지라고 말하면서 더 이상 보모가 필요하지 않다는 표지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메시아 자신의 신실하심은 마침내 성숙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기에 이르렀다는 표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메시아의 신실하심에 반응하여 보이는 믿음은, 민족적 배경과 상관없이, 그가 온전하고 완벽한 하나님 가족 구성원이라는 표지인 것입니다.
3:26-27,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바울은 갈라디아교인들에게 무두 메시아 예수 안에서 이 신실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성경상의 호칭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리켜 내 아들, 내 장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4:22). 다시 말해 이 호칭은 출애굽의 위대한 구원 이야기와 함께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속하신 사건인데, 바울은 아제 이스라엘이 자신을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으로 인식하는 기본 토대가 되는 이 이야기를 계속 전개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는 모세로부터 메시아에 이르는 이스라엘의 전 역사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때와 비슷하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이제 구속의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당신은 성인이 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린아이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가?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장성한 자녀의 표지, 즉 하나님의 자유로운 백성의 표지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책임을 부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의 사람, 신뢰의 사람이고 그들은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메시아 백성에 속한다고 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장성한 자녀가 되는 지위를 부여받을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와 합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이 단어는 ‘메시아’를 의미할 뿐 아니라 메시아는 자신 안에 이스라엘을 전부 망라하는 존재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이 메시아 ‘안에’ 있는 것 혹은 메시아에게 ‘속하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특정 유형의 내적 경험을 하는 것이나, 혹은 그 결과로 나타나는 영적 상태가 아닙니다. 바울에게 이것은 구체적인 공동체, 즉 새로운 왕의 가족, 메시아의 백성에 소속되는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은 세례를 통해 이 가족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메시아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한 가족의 신분을 얻는 입구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세례가 믿음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설명하지 않고, 그 둘 모두 존재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전제합니다. 왜냐하면 세례 받으려는 사람은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세례 받은 이들은 비로소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라고 말합니다. 이제 그들은 메시아의 가족입니다. 그 결과 가족 안에서 그들의 지위,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위치나 서로와 맺는 관계와 관련해 옛 시대의 차이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3:28-29,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바울은 자신을 유대인 그리스도인으로 인식합니다(롬 11:1-6), 바울은 사람들 중에는 여전히 종도 있고 자유인도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왜 빌레몬서를 썼겠는가? 또한 수많은 본문에서 시사하듯이, 남성과 여성의 차이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핵심은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지위와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가족을 약속하셨고, 하나님이 마침내 메시아 안에서 그 한 가족을 탄생시키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당신들은 다른 방법을 써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려고 애쓰는가?를 갈라디아교인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가 인종이나 문화적 계파를 따라 분열되어 있는 모든 상황을 향해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분열은 바울 시대보다 오늘날 훨씬 더 광범위할 것입니다. 특히나 우리나라는 장로교내에서도 수많은 교파가 생기고 있는 현실입니다. 서로가 다 입장이 있겠지만 본문을 비추어 볼 때는 하나님이 과연 어떻게 생각할지 심히 걱정이 되는 부분입니다. 이 모든 것이 성숙치 못한 하나님의 자녀의 행동이 아닌가 쉽습니다. 이 시간 나는 과연 하나님 자녀로서 장성했는가를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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