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마태복음강해]#81. 18:21-35. "용서하라"

2022. 11. 14. 13:50마태복음강해

 

18장은 예수님의 말씀 모음집 가운데 5-7장, 10장, 그리고 13장에 이어 네 번째에 해당하는 장입니다. 본문도 다른 모든 말씀처럼 도전적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이 지키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핵심적인 요점은, 예수님이 이스라엘과 그리고 이 세상과 하나님의 ‘새 언약을’ 맺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500년 전에 예언자 에레미아가 예언한 것처럼(렘 31:34), 새 언약의 특징이 되는 삶의 방식은 바로 용서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에게 용서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고(6:12), 용서받기 원한다면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6:14-15), 오늘 본문은 다시 그 주제를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에서 참 중요한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8:21-22,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베드로는 지금 자신과 관련된 개인적, 구체적 죄에 대해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랍비들은 세 번까지는 용서하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 교훈은 아모스에게서 온 것 같습니다(1:3,6,9, 2:1,4,6). 그러나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정신이 랍비들의 것보다 더 클 것으로 생각해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완전수인 “일곱 번까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한히 용서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말처럼 몇 번을 용서해 주었는지 아직도 세고 있다면, 사실은 용서한 게 아니라 복수를 미루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용서를 미루고 미루고 하면 복수심은 더 커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예 “세어 볼 생각은 하지도 말고 그냥 용서해 주어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또다시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18:23-24,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 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이라고 합니다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당시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의 세금이 2백 달란트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만 달란트는 어마어마한 금액인 것입니다. 이에 왕은 그 종이 불쌍히 여겨 그 빛을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종은 왕에게 받은 은혜를 모르는 종이었던 것입니다.

 18: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백 데나리온은 만 달란트의 60만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그 종은 자기에게 빚진 자를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30절). 그 사실을 왕에게 고하자 왕은 그 종을 옥졸에게 넘긴다(34절)는 이야기를 예수님이 들려주십니다.

 본문에서 마태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주신 한 양동이의 물에서 한 방울의 물을 전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일반적인 죄인(우리 모두가 그렇다)과 심각한 죄인(우리가 생각하는 죄를 많이 지은 사람) 간의 거리는 런던과 파리 간의 거리를 태양에서 바라보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즉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로마서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요점은 모든 분노를 꾹 참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용서하고 잊어버려야’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핵심은 용서와 화해라는 목표를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그 자신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본문은 용서가 이 만큼 중요한 것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그 당시 마태 공동체의 독자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천국 백성이 되는 조건이 너무 까다롭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용서는 무엇일까? 용서는 우리 몸의 폐와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 폐는 앞서 들이마신 숨을 내쉬어야 또 숨을 들이실 수 있습니다. 그 숨을 내쉬지 않고 있으면 금세 질식해 버립니다. 폐에 해당하는 영적, 도덕적, 감정적 기관이 무엇이든 그것은 열리거나 닫히거나 둘 중 하나밖에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기관이 열려 있어서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고 용서를 한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에도 열려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관이 한쪽 편에 닫혀 있다면 다른 쪽 편에 대해서도 닫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 장에서 말하는 어린아이의 비유에서처럼 우리가 “미안해” 혹은 “용서해 줄게”라고 말을 하지 못하게 막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의 어린아이 같지 않음이 아닐까? 다시 말하면 거듭남이 되지 않았다는 말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거듭남은 단 번에 이루어지는 것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 거듭남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즉 신앙생활을 통해서 끊임없이 도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성화’의 과정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깨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할 것은 성령충만인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날마다 치르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나는 어떤 기도를 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