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야고보서강해]#9. 4:11-17. "비방하지 말라"

2024. 7. 29. 11:53야고보서강해

 

오늘 본문은 서로 비방하지 말고 주님의 뜻을 따라 행동하라고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율법을 받아들이고 그 율법에 따라 살아가는 겸손을 배웠다면, 삶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 다스림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겸손을 배웠다면, 우리들은 어떠한 삶으로 부름 받았는지 좀 더 분명하게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생의 중요한 결정, 당신의 소명이나 인생의 길과 관련한 문제일 수 있습니다. 혹은 이웃이나 낮선 이들에게 작은 친절을 베풀라는 성령이 주시는 가벼운 자극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극을 받거나 그런 부르심을 받고 나서 그것을 무시하거나 못 들은 척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는 더 심각한 교만의 행위일 것입니다. 마치 다른 사람들의 율법에 관하여 심판은 하지만 정작 자신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고 다르다는 이유로 ’보통 사람들에게 잘못된 행동이 자신에게는 괜찮다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은 엄청난 허영을 드러내며 파멸로 치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4:11-12,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는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율법에는 분명 형제를 사랑하라”(19:16-18)고 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헐뜯고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겸손한 태도가 아닐 뿐만 아니라 율법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율법을 판단하고 그릇 해석하는 것이 된다고 야고보는 논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제정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시기 때문에 사람을 판단하시는 분은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뿐이신데, 이웃을 판단하려 한다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올려놓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란 것입니다. 우리는 ’죄‘와 ’죄들‘을 구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의 인격체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에게 언제 들어왔는지에 대해 성경은 ’선악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선악과로 인해 우리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죄에서 파생되는 것이 ’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죄‘에 대해서 회개를 한다는 것은 ’죄들‘에 대해 참회를 하는 것입니다. ’회개‘란 개념은 하나님에게로 돌아온다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개념인 것입니다. 야고보는 본문에서 당신이 진정 거듭났다면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심판을 하면 안 된다고 강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율법이 말하는 대로 행하려 하기보다는 율법을 심판하고 있다고 야고보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단지 어리석고, 오만한 정도가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이 앉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입법자이자 심판자는 실로 구원하실 수도 있고 멸망시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최고의 율법(1:25, 2:8, 2:12)위에 둔다면, 자신은 그 율법에 의해 심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본문은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두려는 유혹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13-16절에서는 한 사람의 장래 계획과 관련해서 이러한 위험을 강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4:13-14,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 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야고보는 작은 사업을 하는 그리스도인을 예를 들고 있습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다른 도시로 가서 거기서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미래는 그렇게 계획하고 설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이제 메시아 백성이므로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니, 우리의 계획은 더 확실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인지 모르냐고 말합니다. 아침에 보이는 안개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 안개는 아름답고 신비롭게 보일 수도 있지만 태양이 떠오르면 사라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생명이 이렇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일은 고사하고 오늘 어떨지도 모르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라고 야고보는 말하고 있습니다.

4:15-16,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하루하루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 여기고, 그런 시각으로 계획 세우는 법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장래 계획을 세울 때 하나님의 주권을 빼앗지 않으려고 조심을 하고 그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하시면이나, “주님의 뜻이라면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라틴어 약어 ’DV’(데오 볼렌테)로 축약하여 표시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것 역시 사람들이 생각 없이, 혹은 실제로 별 의미 없이 말하는 구호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이 가르침이 기독교적 사고의 바탕이 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이 장은 앞에서 언급했던 경고보다 훨씬 일반적이면서도 훨씬 더 불안을 야기하는 경고로 끝맺습니다.

4:17,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본문을 접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계속 자기 성찰의 고뇌를 겪기도 할 것입니다. 나는 불충실하지 않은가, 불순종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런 마음의 성찰을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강박적으로 염려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그림 한가운데 두고 하나님과 이웃보다는 나와 내 생각과 내 마음 상태에 모든 주의를 집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 중심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삶을 살아야 하는데 자칫 잘못 생각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중심으로 사신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적 돌봄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과연 나의 성찰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