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고린도전서강해]#1. 1:1-9. " 하나님 은혜에 감사"
우리는 그 당시 바울의 신학사상을 알아야 바울서신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바리새파 중에서도 강경파인 샴마이 학파로 분류됩니다. 그는 온건파인 힐렐 학파의 가마리엘 문화생이지만 그는 강경파였습니다. 그런 그가 무엇을 추구하고 있었는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창조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른 것은 아담의 죄로 인한 문제를 원래 상태로 되돌리는 사명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와 세상 권세의 싸움에서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또한 그 당시 유대인들은 부활 사상을 믿었지만 지금 우리들이 생각하는 '죽을 때 천국 가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관심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셨다고 믿는 그 구원에 있었습니다. 이 당시 유대교 신학은 유일신론, 선택 사상, 종말론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는 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하나의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데, 이 미래는 그렇게 멀리 있지 않으며, 그 종말의 때에는 참 하나님이 귀환하셔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악을 물리치시며 그의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바울 또한 이 모든 내용을 믿으면서 그는 성경을 종말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로 읽었으며, 자신이 그 종말을 가져오는 데 일조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샴마이 학파와 그들에게 동조하는 혁명세력은 토라를 향한 그들의 열심을 통해 이 예언을 열렬히 실현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막연히 기다리기보다 스스로 행동하는 편을 택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로마서 10:2절에서 언급한 '하나님을 위한 열심'의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잘못 알아서 거짓된 열심을 했다는 것입니다.
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강경파인 바울이 예수믿는 자들을 핍박을 하다가 사도가 된 것은 다메섹 사건 이후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부활한 예수를 만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역사의 마지막에야 하실 그 일을 역사의 중간 지점에서 한 사람 나사렛 예수를 통해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현시대' 즉 죄와 악의 시대가 여전히 지속되는 중이지만, '도래할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도래할 시대'가 이미 온 것이라면, 그리고 부활이 이미 일어나기 시작했다면, 그것은 이제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들어올 때가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 전도에 그렇게나 목숨을 걸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한 예수를 만난 것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특별히 사도직을 주었다고 생각하여 바울은 자기는 사도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편지 대부분에서 그렇듯 바울은 첫인사 후 그들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바를 말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나중에 이야기할 내용 가운데 일부를 넌지시 암시합니다.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하나님이 특별한 목적을 위해 왕이신 예수님 안에서 그들을 구별하셨습니다 이것이 '거룩하게 하다'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서 가장 아끼는 옷이 있는데 이 옷은 가장 특별한 상황에서만 입는 옷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거룩하다'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특별한 목적을 위해 사람들을 구별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은 대다수 유대인이 아니라 평범한 '이교도'였습니다. 그들은 각양각색 신들을 믿던 이방인이었고, 성경의 역사와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세상은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거나, 자신의 삶이 그 역사의 수레바퀴 한 부분이 된다는 관념이 전혀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이 교훈을 터득하기를, 곧 그들이 한 분이신 참 하나님, 이스라렐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이 드러나는 거대한 운동에 붙들렸다는 것을 알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참 어려운 과제입니다.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바울 서신을 읽어야 합니다.
일단 그들이 특별히 구별되었다면 그들은 "왕이신 예수 우리 주의 이름을 부르는"모든 형제자매에게 속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참된 왕, 세상의 참 주님 안에서, 이스라엘의 한 분 하나님이 친히 세상에 임재하셨고, 모든 백성을 그분의 가족으로 소집하신다. 이것이 바울 사상의 핵심이며,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공동체 생활의 핵심입니다. 3절은 그런 공식 가운데 하나로,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왕이신 주 예수로부터 은혜가 평화가"그들에게 임하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 은혜의 결과, 하나님의 풍요로 그들은 풍성해졌습니다.
1:5-6,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이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고린도교회는 특히 성령의 은사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세요 이방신을 믿던 사람들에게 성령의 역사함이 없었다면 그들이 과연 바울에게 관심이나 주었겠습니까? 그들은 이제까지 그들이 믿던 이방신들에게 일어나지 않았던 특별한 경험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성령의 은사인 것입니다. 특히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특별한 경험인가~
1:7-8,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한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바울은 이제 서서히 본론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너희들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함을 증표로 받았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모든 일을 마무리 지으실 때까지, 하나님께서 친히 여러분 곁에 계시면서 여러분을 흔들리지 않게 해 주시는데 무슨 걱정이 필요한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1: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이는 하나님의 약속은 틀림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약속했다고 했을까요? 처음부터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 권세를 물리쳤다고 전했을까요? 그러면 그들이 얼씨구나 하고 받아들였을까요? 아마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포로생활에서의 귀환'이라는 거창한 민족적 개념의 구원에 대해 서보 다는 개인의 구원에 대해서 전했을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들이 관심을 가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신앙이 자라면서 예수님이 진정 무엇을 전했는지를 터득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가지고 오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다스리는 전쟁이 없고 다툼이 없고 오직 사랑으로 평화로운 세상 말입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에게 이것을 가르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 현재 성도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들 개인적인 구원에만 관심이 있지, 이 땅에 진정한 하나님 나라가 건설되는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이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나라 교회 상황과 비슷합니다. 이방인의 나라인 우리나라도 오랫동안의 토착신앙인 토템이 우리들 DNA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윗대 할머니 어머니들이 했던 새벽에 정한수를 떠 놓고 자식이 잘되기를 비는 것입니다. 즉 기복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를 통하여 구원의 개념을 우리 개인이 아닌 이 세상 전반에 걸친 것으로 좀 더 크게 생각을 해볼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성숙인 것입니다.
이 시간에 생각해봅시다. 나의 신앙의 수준은 어디인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