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읽기 쉬운 고린도전서강해]#17. 6:9-11. "상속 받는 자와 못 받는 자"

이헌교 2021. 11. 15. 17:06

 

 바울은 사람이 예수를 부활하신 주로 믿으면 그 사건 자체가 영(성령)이 복음을 통해 역사하심을 나타내는 표지요, 영이 믿음을 그 첫 열매로 삼는 '선한 일'을 시작하시면 영이 그 일을 마치시리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가 빌립보서 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도가 나태하거나 여유를 부리거나 성도 자신은 인간으로서 해야 할 노력도 전혀 하지 않은 채 영이 그 모든 일을 하시게 수수방관하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음을 이야기합니다. 마치 운동선수가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하는 것처럼 바울은 자신이 몸을 연단하여 복종하는 노예로 계속 만들어갔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고 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우리들의 노력이 없이는 성령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움직여야지 성령이 능력을 우리들에게 주어서 우리는 그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자와 못 받는 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초창기의 예수 공동체는 성령의 강력한 임재와 인도에 크게 의지했습니다. 그들이 공동체의 공동생활을 조직하고, 유대인은 물론이요 비유대인에게도 예수에 관하여 전하기 시작할 때면 그들이 이전까지 알아왔던 것과 다른 어떤 에너지가 역사함을 알았고, 누군가가 그들을 이끌어 주심을 인식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저 없이 그 에너지를 그들 활동의 근원으로 지목했고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면 고린도 교회도 처음에는 성령의 임재와 인도함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방신들과 이방문화가 넘치는 고린도에서 기독교 공동체가 생겨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떠난 고린도 교회는 분열과 성도들의 문란함이 세상 사람들과 다름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다시 옛날로 돌아온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6: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 하는 자나" 하나님은 예수를 통하여 진정한 인간성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에 걸맞지 않은 특정한 행동 방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이 되고자 한다면, 그런 행동 방식을 버려야 한다고 바울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직 그런 인간성을 벗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 공동체로 들어가는 것은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모든 사람에게 부담이 된다는 것입니다.
 본절은 성적 부도덕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상숭배 또한 음행하는 자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에서 여신 비너스의 무녀들은 신전에서 공공연하게 매춘부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고린도 같은 항구 도시나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도시일수록 이런 성적 부도덕이 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성 문제에 있어서는 결과가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 인간은 몸과 지성, 감정, 상상력의 매혹적인 상호 작용 속에서, 성적 존재로서 우리의 인격과 행위가 우리 삶의 다른 모든 측면에 영향을 주게끔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을 하찮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인간성을 하찮게 여기는 것입니다. 성욕은 인간의 본능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직업이 매춘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성욕은 인가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입니다. 성경은 그 시대의 부패성을 성적 문란을 들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성적 문란을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에게 짝을 지어 준 것도 이런 성적 문란을 방지하기 위함이며 새로운 피조물을 탄생시키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 또한 우리들이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6: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본절은 하나님이 독단적 규칙 목록을 갖고 계시고, 그것을 어기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성적 문란이나 본절에 나오는 이런 왜곡된 방식이 하나님이 창조 세계에서 꽃피기를 갈망하시고 마지막에 '하나님 나라'에서 완성될 온전한 인간을 훼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분의 형상을 완전하게 반영하는 사람들로 가득할 것인데 하지만 그 형상을 왜곡하고 훼손하는 현재의 행동은 그들을 반대 방향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신약성경 전체가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본문을 쉽게 번역을 하면 "물론 여러분 가운데 그런 사람이 일부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깨끗이 씻겼습니다. 여러분은 거룩해졌습니다. 왕이신 예수 주의 이름으로, 그리고 우리 하나님의 영으로, 여러분은 다시 의롭게 되었습니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 전제에서 하는 말씀은 사람들이 자신의 과거와, 더 나아가 현재를 버리고 그분의 미래를 향해 나아갈 방도를 하나님이 친히 마련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든, 당신은 깨끗이 씻길 수 있습니다. 현재 어떤 모습이든, 당신은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왕이신 예수 주의 이름으로, 그리고 우리 하나님의 영으로"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것은 말하는 방식에는 아마도 초기 기독교의 세례 관행이 반영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외적 표지인 세례와 내적 실재인 믿음을 통해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이 될 때, 우리는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고, 새로운 생활 방식으로 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은 이 새로운 정체성과 생활 방식이 저절로 이루어진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그가 이 편지를 쓰는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있고 세례를 받으면, 다른 생활 방식, 인간이 되는 전혀 새로운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이 길을 어떻게 가는 것은 순전히 우리들의 몫인 것입니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믿는다고 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거듭남'을 그냥 선물로 받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바울은 그 길이 열렸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열린 길을 우리가 어떻게 달려가는 것은 순전히 우리의 몫인 것입니다. 그 달려갈 길의 지침서가 성경인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 길을 달려갈 길을 인도해줄 뿐만 아니라 그 길을 달려갈 수 있는 능력도 준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달려가는 이 길은 많은 유혹과 고난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런 유혹과 고난을 이겨내고 하나님 형상을 닮아가는 새로운 피조물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결단과 노력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움직여야지 우리 안에 내재하고 계시는 성령님이 능력을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간에 생각해봅시다. 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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