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읽기 쉬운 고린도전서강해]#2. 1:10-17. "분열을 조심하라"

이헌교 2021. 10. 26.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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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에게 새로운 소명은 바울 자신의 새로운 종교 체험을 만끽하고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공적인 사건으로 이해한 사건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이야기를 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고 그를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인정하셨으며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정의와 평화가 왕 노릇하는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고 계신다고 이방 세계에 선포해야 하는 것을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그 당시 대다수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성경을특별히 종말을 고대하는 관점에서 보았으며, 더 나아가 그 종말을 앞당기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종말의 때에는 이방인들이 "만군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그날에는 말이 다른 이방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슥 8:23)라는 말씀이 바울로 하여금 이방 선교에 목숨을 걸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오직 예수님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린도전서를 통하여 예수님의 좋은 소식인 복음과 인간의 지혜가 지닌 권력 사이에서 벌어지는 충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고린도와 그 공동체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는 주전 146년에 로마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주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로마 식민지로 재건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는 그리스 영토 위에 세워진 로마 도시라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또 고린도는 지적 활력이 대단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이 도시에는 명성이 높은 철학자, 지혜와 이론과 실체를 가르치는 전문 교사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소피스트'였습니다. 이들은 곳곳을 누비며 자기 제자들을 만드는 일에 몰두했고 그 제자들은 어떤 선생이 가장 뛰어난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한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고린도전서를 해석을 하면 좋을 것입니다. 
 1: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바울은 이때 에베소에 있었습니다. 고린도에서 예베소로 오려면 배를 타고 와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소식을 전하기 위해 글로에란 사람이 자기의 종을 보내 고린도 교회의 분란에 관하여 전했다는 것은 그 분란이 좀 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분란의 내용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블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12절)이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를 떠나고 나서 오래지 않아, 성경에 통달할 뿐 아니라 그것을 감동적을 풀어내는 뛰어난 강사가 도착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블로 였습니다. 아블로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신이었습니다. 그곳에는 탄탄한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는데, 필로 라는 유명한 유대인 철학자도 거기에 있었을 만큼 학문적으로 명성이 높은 곳이었습니다. 아블로는 에베소에 머물다가 거기서 바울의 동료들을 만났고(행 18:24-28) 그들에게 기독교 메시아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 아불로는 고린도로 갔고(행 18:27-19), 바울이 에베소에 돌아왔을 때는 고린도에 있었습니다. 아무튼 고린도 교회에서는 아블로의 가르침, 스타일, 방법 등이 바울의 것보다 선호한 이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고린도에는 베드로에게 속한 이들도 있었고 메시아 백성이라고 주장하는 네 개의 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직접 고린도를 방문했는지, 아니면 다른 순회 그리스도인들이 고린도에 와서 베드로가 가르친 것을 가르친 건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진짜 메시아의 백성이라고 주장한 이들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 지도자나 저 지도자를 따르지만, 그들은 오로지 왕이신 예수님만 따른다고 고백하는 부류입니다. 
 바울은 싸움판에 끼어들어 무리하게 말리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어리석게 처신하지 말라고 말하는 13절에서 그런 기미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13절). 이말은 메시아야 말로 중요한 분이시다. 사도에서부터 가장 어린 회심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분의 몸을 이루는 구성원일 뿐이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기가 세례를 준 사람은 '그리스보오 가이오, 스데바나 집 사람뿐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14-16절)
 1: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세례를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세례는 하나님, 당신의 가족, 지역 공동체, 더 나아가 전체 교회 앞에서, 당신이 낡은 정체성을 버리고 메시아 안에서 하나님 백성의 새 생명에 진입했다는 공식적, 외적 표지였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세례는 출애굽 시대의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종살이에서 벗어나 자유와 책임의 영역으로 들어갔다는 뜻입니다(10:1-13). 하지만 세례를 받는 단 하나의 이름은 메시아의 이름입니다. 누가 세례를 주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말하고 있는 바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과 아불로, 베드로, 심지어 왕이신 예수님을 서로 대결을 벌이는 흔한 교사(소피스트)로 대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누구인가? 우리들은 다들 예수님이시다는 것을 머리로 알고 있고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교회의 주인이 예수님이시다는 것을 심장으로 받아들인다면 교회에서는 분란이 일어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교회 중에 역사가 오래된 교회들 치고 분란이 일어나지 않은 교회들은 아마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분란이 초대교회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다니 다시 한번 기독교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종교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에 사람이 만들었다면 분란이 일어나면 지금의 우리나라 정당처럼 해처 모여하고 새롭게 정당을 만드는 것처럼 기독교는 2,000년 동안 존재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2,000년 교회사를 보면 분란의 역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기독교가 아직도 존재를 하고 있다는 것은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앞으로도 교회는 계속 분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이런 혼란 속에서 하나님과의 만남 그리고 하나님과의 사귐, 이런 성도들이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아닐까요? 그러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참 어렵다는 말이 됩니다. 
 이 시간에 진지하게 생각해봅시다. 나는 과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