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읽기 쉬운 고린도전서강해]#51. 15:29-34. "현재 삶에 의미하는 부활"

이헌교 2022. 2. 24. 21:28

 

그 당시 일부 철학자 그룹에서는 사후에 육체를 벗어난 아름답고 찬란한 삶이 있다는 사상이 인기를 누렸지만, 당시 대다수 평범한 이방인들은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경험을 통해 죽은 자의 부활을 부정하는 것은 근거가 없으며 그것은 무서운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15:29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 많은 해석이 있는 어려운 본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일부가 세례를 받지 못한 채 죽었고, 그들이 정말 메시아께 속했다는 표지이자 상징으로 다른 사람들이 대신 세례를 받는 관습이 있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리스도인이었던 가까운 친족이나 친구가 죽고 난 뒤, 최후의 부활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계속 함께하고자 자진해서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단한 비그리스도인들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만약 우리가 기대할 부활이 실제로 없다면, 고린도인들이 공식적 관행으로 받아들이던 일들이 터무니없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15:30-31,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부활이 없다면 미래의 소망이나 영광은 없을 것이며, 따라서 고난과 핍박을 받으며 전도하는 것은 어리석고 무의미한 일이 된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긴 것은 우상 숭배와 이교 문화에 빠져 있던 고린도에 살면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부활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이 자랑스러운 일을 걸고 확신 있게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앞 절의 "위험에 처한다"는 말보다 더 강한 표현이며, 죽음과 삶이 교차되는 긴박하고도 위험한 날들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5:32,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예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을 하면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검투사들처럼 경기장에서 짐승들과 싸우지 않은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비유적으로 그것에 비길 만한 엄청난 고난을 당하고 또한 맹수처럼 악하고 사나운 사람들과 더불어 싸운 것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앞 절에서 "날마다 죽습니다"에 대한 구체적인 실례를 제시하는 것이며, 부활이 없다면 그런 싸움은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이며, 또 부활이 없다면 쾌락주의자들처럼 "내일 이면 죽을 것인데 먹고 마시자"라고 말하면서 고통을 피하고 향락을 추구하려고 할 것이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5: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본문은 그리스 시인 메난드로스를 인용한 구절입니다.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이제는 마땅히 이웃 이교도들에게 살아 계신 한 분 하나님의 진리를 보여 주고 말해 줄 수 있어야 할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이, 도리어 이웃들의 이교적 사고방식에 영향을 받아 핵심 신앙인 부활을 왜곡하고 부정할 지경에 이르기까지 수수방관했다는 것입니다. 
 15:34,"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로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복음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참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8:1-6). 하지만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일부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부활을 부인하거나 왜곡시키는 이단의 영향을 받아 부활에 대해 회의적은 태도를 가지고 방종한 생활을 일삼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바울이 갑자기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자들을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의 더러운 행실(33절)과 연관 지어 언급하는 것은 고린도 교회 내에 하나님에 대한 특수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무리들이 있었음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그들은 영지주의적 부류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영은 고결하고 육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고를 지니고 있었어 방종한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스스로 하나님에 대한 중요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에 대해, 실상 그들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있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자칫 속을 위험이 상존합니다. 주변 문화와 그 사상의 영향력이 기독교 세계관에 침투해 들어와 진리가 거짓으로 둔갑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새로운 사상과 맞닥뜨릴 때, 특히 믿음의 핵심적 측면에 대한 의문이 생길 때, 이것은 기독교적 관행과 일치하는가? 이것은 믿음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겪는 고난과 부합하는가? 이것이 이교도 사상에서 흘러나왔다는 결정적 표지는 없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이해와 지식을 보여 주는가? 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기독교가 탄생하고 2,000년이 지난 지금 기독교는 시대 조류에 편성하여 많은 신학과 사상을 나았습니다. 그러나 변함이 없는 핵심 사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아니 부활을 믿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면서 부활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그냥 교회를 사교적 모임으로 생각하고 다닌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부활 사상의 핵심은 하나님의 신뢰와 믿음입니다. 이 시간에 묵상해봅시다. 나는 부활 사상을 믿는 만큼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고 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