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누가복음강해]#38. 11:1-13. "주의 기도"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주기도문에 대한 말씀입니다.
11: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제자들은 지금까지 어떤 기도를 했기에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을까? 아니면 기도를 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아니면 예수님이 어떤 기도를 하는지 궁금했던 것일까?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지 않았다는 것도 이상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깨닫기를 바랐던 것인가? 아니면 물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가? 다시 말하면 이제야 제자들이 기도에 대하여 눈을 뜬 것 같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하여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첫쩨.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입니다(사 6:3). 기도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전능하심과 유일하심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찬양한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을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겨지길 간구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이사야가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의 존전에 말한 것과 같이 자애로우면서도 크고 두려운 전능자 앞에 나가 그의 이름을 높이고 찬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사 8:13). 기도하면서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은 그의 이름을 욕되게 만드는 행위이므로 우리는 기도하는 순간을 우리들의 소원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간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는 내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안에 내재하고 계시는 성령님이 나를 다스린다는 말입니다. 즉 날마다 영적 전쟁을 이기게 해 달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셋째,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염려는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과의 소통을 가로막기 때문에 먹고사는 문제를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지금 내게 주시는 일용한 양식에 만족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넷째. 죄 용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용서를 받아야 할 대상일 뿐만 아니라 용서해야 하는 존재이며, 하나님의 용서를 전달하는 존재이기 합니다. 이웃을 사랑을 하려면 우선 용서하는 마음이 내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빵이 우리의 육신을 살리는 것이라면 용서는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도구인 것입니다. 죄 용서가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동행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웃에게 용서하지 않으면서 우리들은 하나님께 죄 용서를 받기를 원한다는 것은 잘 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시험에 들지 않게 해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죄와 영혼이 구원을 받았지 죄악 된 우리 몸은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악 된 우리의 본성과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전쟁인 것입니다. 시험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영적 전쟁에서 이기게 해 달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간청하는 친구의 비유를 들면서 기도하는 방법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친구가 예고 없이밤에 찾아와 떡 세 덩이를 빌려 달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의 친구가 여행 중에 급히 찾아왔는데 줄 음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6절). 그 당시 서민들은 한 방에서 온 가족이 같이 잠을 잤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떡을 줄 수 없다고 돌려보낼 친구는 없다는 것입니다(7절). 그 당시 문화는 친구를 환대하는 의무가 있는 관계로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간청을 할 것을 가르치십니다. 친구도 밤늦게 찾아와 간청을 하면 들어주는데 하물며 우리가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은 한 밤중에라도 간청하면 무엇이든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야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고집을 부리는 기도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분명히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하는 것이라고 앞 단락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연장선에서 본절의 말씀을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9-13절에서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과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소개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9절). 하나님은 주시고 찾게 하시고 열어주실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가정의 일상을 통해 설명하십니다(11-13절). 아버지라면 아들이 생선을 달라는데 생선과 닮은 뱀을 줄 리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자녀들에게 대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어떻게 대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이 배고파도 우리의 자식들이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부릅니다. 바로 하나님도 그런 심정으로 우리들에게 사랑을 나누시는 분이시다는 것을 예수님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누가는 본절 말씀에서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목적인 것입니다. 기도는 성령 충만을 위하여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내재하고 계시는 성령의 충만으로 인하여 우리는 날마다 치루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 전쟁에서 승리를 하면 우리는 성령님의 지배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성령의 힘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생사화복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라고 그 결과로 우리는 성령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령을 받기 위하여 한 밤중에 친구집에 찾아가서 떡을 빌려올 수 있는 간절함과 막무가내, 몰염치, 무례함이 들 정도로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령님을 받게 다는 데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실까~
성령의 충만함을 맛보지 못한 사람은 지금 이 말의 뜻을 잘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해본 사람들은 이 성령의 충만함이 어떤 것인 줄을 압니다. 성령의 충만함이 주는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것입니다. 바로 이런 기분이 천국의 기분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현재 살아서 이 세상에서 천국의 기쁨을 맛보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잘 못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대강 살고 죽어서 천국에 가면 멋지게 살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이미 예수님을 통하여 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천국의 맛을 느껴보지 못하고 어떻게 죽어서 천국을 알 수 있을까?
이 시간에 생각해봅시다. 지금 나의 내면의 세계는 천국같은가? 만약에 죽어서 현재의 나의 내면의 정신세계가 계속된다면 나는 좋은가? 아니면 끔찍한가? 무엇이든 우리들이 구할 것은 성령 충만인 것이다는 것을 명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