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누가복음강해]#58. 16:19-31. "부자와 나사로"
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 대한 말씀입니다.
기독교는 313년 밀라노 칙령에 의해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동안 물밑에서 논란이 되었던 수많은 논쟁들이 공식적으로 제기가 되었습니다. 이 중에서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에 대해서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다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고 완전한 신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완전한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물리적 한계를 넘지 못하는 것을 말하며 '완전한 신'은 '전지전능'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죄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많은 목사들은 신학교에서 배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점에서 많은 혼란을 겪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물 위에 걷고 귀신을 물리치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함으로 해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적을 예수님이 공생에 동안 인간이 되었다가 신이 되었다가 한다고 가르치는 목사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지주의'적인 발상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기초적인 신학이 있어야만 성경 해석을 올바르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칼빈의 '직업소명설'이 없었다면 과연 자본주의가 그렇게 빨리 정착을 했을까? 그리고 돈 많은 부자들은 그 마음이 편했을까? 오늘 본문 말씀은 칼빈의 '직업 소명설'이 없었다면 부자들은 천국에 가기 어려운 사람들이 되어서 살면서 항상 마음이 불안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의 신학은 결과적으로 이런 부자들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 된 것이네~.
오늘 본문 말씀은 일차적으로 부와 가난에 대한 도덕적우화가 아닙니다. 본문 말씀은 고대 세계에 널리 알려진 민간 설화라고 이야기하는 신학자들이 많습니다. 우리나라의 설화 중에서도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민간설화를 빌려서 바리새인들에게 이야기를 했다면 이 이야기에서의 비유를 찾아야 합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15장에 나온 탕자 이야기와 닮은 점이 많습니다. 큰 아들과 부자는 가난한 자, 누더기를 걸친 형제나 이웃을 눈에 띄지 않는 곳이나 마을밖에 두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소외된 자와 죄인을 환대한다는 이유로 비난받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보기에는 사회의 기강을 흔드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요점은 돈을 사랑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들을 부자가 나사로를 대했듯이 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청지기가 청지기 자리에서 쫓겨나야 했지만 아슬아슬하게 총체적 파국을 막는 행동을 취했다고 칭찬을 들었듯이, 바리새인들, 그리고 비슷한 노선을 취하려는 사람들 누구나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지금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를 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원하는 것은 사실 모세와 예언자들이 말한 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누가가 시종일관 분명히 밝히듯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사명은 이스라엘 전체를 대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16: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 지니라" 모세와 선지자들에 무엇을 들으라는 것인가? 예수님은 지금 구약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을 똑바로 이해를 하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을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해서 그 율법을 수천 가지로 세세하게 세부적으로 나누어서 지켰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율법의 정신에 대해서는 몰랐다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그 당시 문맹률은 95%가 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부분 농업에 종사한 농민들이기 때문에 하루하루 먹고사는 것이 고행인 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아마도 일반 백성들은 율법보다도 빵을 더 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회의 기득권들은 이런 백성들의 아픔을 뒤로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킨다는 우월성과 교만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예수님은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선민사상은 민족적 자존심과 직결이 되며 로마에게 무력으로 대항을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치 에레미아가 남유다에게 그렇게 외쳤던 바벨론에게 항복을 하고 다음을 기약하자고 외쳤던 것과 같이 로마에게 무력으로 대항하지 말라고~ 만약에 무력으로 대항을 하면 예루살렘성은 벽돌 한 조각 남지 않고 멸망을 할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다스리는 나라라고 외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을 강해를 하면서 마치 에레미아서를 읽는 느낌은 무엇일까? 그런 예수님이 이 시대의 교회에 오시면 무엇을 외치고 싶을까? 예수님이 물위를 걸었다는 것을 성령의 역사함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면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이 물 위로 걸으시고 귀신들을 물리치신 것을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을 하지 않고 자기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옳다고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한 번 각인된 신앙관을 바꾸는 것은 어렵습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바리새인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바리새인들이 틀리고 예수님이 옳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임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정신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령의 역사함은 무엇일까? 이직도 많은 목회자들은 성도가 감기만 들려도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사역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 하시는 일은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믿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마치 알라딘 요술 램프처럼 사용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야아 합니다.
이 시간에 나는 혹시 예수님이 그렇게 싫어한 바리새인들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닐까?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