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

[읽기 쉬운 마태복음강해]#8. 4:12-17. "하늘나라를 선포"

이헌교 2022. 6. 7. 17:12

 

우리는 예수님이 다가온다고 말씀하시는 이 하늘나라(kingdom of heaven)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취하기를 예수님이 기대하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모든 존재와 행동의 핵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그냥 하늘나라는 죽어서 가는 천국 정도로 생각하고 또 그렇게 목회자들도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위해 쓰인 복음서입니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1세기 유대인들입니다. 우리는 그 당시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마태복음을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존경심 때문에 ‘하나님’이라는 표현 대신에 ‘하늘’이라는 표현을 일반적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복음서들은 ‘하나님 나라’라는 문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가 어떤 장소를 의미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즉 하늘을 하나님의 백성이 죽은 후에 가는 어떤 장소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러한 해석은 전혀 맞지 않습니다. 만약에 하늘나라가 그러한 곳이라면 어떻게 ‘다가온다’ 혹은 ‘도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말할 수 없다면 ’하늘나라‘가 ’하나님 나라‘와 같은 뜻이라면, 그러면 그 당시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하나님 나라 혹은 하늘나라의 의미를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곧 혁명을 의미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또한 하나님 나라 운동의 분위기 속에서 자라셨습니다. 로마인들은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약 60년 전에 예수님의 고향 땅을 정복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땅을 정복했던 여러 이교도 민족 중 마지막 민족이었는데, 헤롯 왕가를 그들의 꼭두각시 군주로 세워서 대신 다스리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유대인은 로마 측과 헤롯 측 모두를 싫어했고 반란의 기회가 오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적 상황을 이해해야만 본문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정복된 민족들이 대개 바라는 그러한 자유를 갈망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자유를 원한 이유는 하나님과 자신들의 정체성,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해 그들이 믿었던 것 때문입니다. 온 세상을 만드신 유일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리고 자신들이 그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라면, 이교도 이방인들의 통치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언젠가는 정말로 그들을 구출하시고 모든 것을 바로잡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러한 약속들은 특히 한 가지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왕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왕이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왕은 마침내 정의와 평화를 가져올 왕, 거꾸로 된 이 세상을 다시 바로 세우실 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혁명가들은 오직 하나님만이 왕이 되셔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이 하나님 나라, 즉 하늘나라를 갈망했고, 이를 위해서 기도하고 열심히 일했으며, 이를 위해서라면 죽을 준비도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가. 하늘의 주권적 통치가 다가오고 있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마태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입니다.

 4:12-14,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룰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마태는 지금 예수님이 이사야가 말하는 메시아이심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9:1-7. “보아라 이 분은 이미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분이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앞으로 태어날 아기, 오실 메시아 그를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진정으로 해방시키실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4: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본문은 이사야 9:2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이사야가 활동할 당시는 북쪽 갈릴리가 이미 앗수르 제국에 망하고 난 후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쟁에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끌려가서 아무 소망 없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스블론과 납달리 땅 즉, “요단 저편에서 해변에 이르는 곳과 이방 갈릴리여”라고 하면서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다고 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갑작스러운 빛에 눈부셔하는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는 지금 이사야가 예언한 분이 바로 이 사람이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하나님 나라는 희망만이 아니라 위험도 의미합니다. 정의와 평화가 오고 있는 중이라면, 정의를 왜곡하거나 평화를 방해한 사람들은 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시간이 있을 때 행실을 바로 잡는 게 좋을 것이다라고 본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회개’란 것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회개는 우리가 지은 자범죄를 가지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참회’입니다 그러면 ‘회개’는 무엇일까? 그 말의 뜻은 ‘방향을 바꾸다’, 혹은 ‘돌아서서 다른 길로 가다’, 혹은 ‘하던 일을 멈추고 그 반대의 일을 하다’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어떻게 느끼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느냐입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사람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일반적인 종류의 혁명에만 온통 정신을 쏟았습니다. 즉, 지배 세력에 대한 군사적 저항과 그 결과로 쟁취할 군사력만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받으신 유혹 중 하나가 바로 하나님의 메시아로서 자신의 지위를 사용해서 스스로 권력과 특권과 영광의 자리에 오를 어떤 사회 운동을 시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 운동의 문제는 그것이 어둠으로 어둠과 맞서 싸운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그 싸움에만 계속 열중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에 대한 예수님의 메시지는 개인의 죄를 반성하라는 것이 아니라(물론 예수님은 그것도 원하시겠지만), 하나의 민족으로서 그들이 폭력 혁명이라는 낭떠러지로 내달리는 것을 그만두고 그 반대 방향으로, 빛과 평화와 치유와 용서의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들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이 세상을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것은 우리가 마태복음을 계속 읽으면서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빛을 지닌 자들이 어둠을 고집하면, 그들은 어둠을 얻을 것입니다. 평화의 사람들이 전쟁을 고집하면, 그들은 전쟁을 치를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가져오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미워한다면, 증오가 따를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임의적인 심판이나 처벌이 아닙니다. 그들이 자초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시간이 있을 때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오고 있는데 그들은 그 길을 막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세우신 나라가 이제 우리 앞에 동일한 도전을 하며 서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일까?

 이 시간 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 길을 막고 서 있는가? 즉 회개를 했는가? 를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