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사도행전강해]#19. 5:12-16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그 일행이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에서 병 고침과 말씀을 전하는 사역을 했다면 그렇게나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그 일을 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우리가 생각하는 큰 교회나 성당처럼 단일한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한 지역 전체에 달할 만큼 수만 제곱미터에 달하는 면적을 차지하고 벽으로 둘러쳐져 있었으며 문과 출입구가 여러 개 있었습니다. 또한 당번을 서는 제사장들이 묵을 수 있는 집도 있었으며 중앙의 지성소에 이르려면 몇 개의 뜰을 지나야 했을 정도로 예루살렘의 성전은 거대했습니다. 이런 곳 앞에서 베드로와 요한 그 일행들이 사역을 했으니 당국에서는 신경이 매우 쓰였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대형 식당 앞에 포장마차가 장사를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더군 더 나 그 포장마차에 손님이 많이 간다고 하면 대형 식당과 관련된 사람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5:12-14,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사도들은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난 후에 한 출입구 곁에 머무르는 습관이 생겼는데 그 곳이 솔로몬 행각이라고 본문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솔로몬 행각은 성전의 동쪽 외벽에 향해 있으며 약 8~9m 높이의 돌기둥이 162개 세워져 있으며 그 위에 백향목 지붕이 있는 행각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곳에서 설교하셨으며(요 10:23)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토론이나 모임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솔로몬이 지었다는 전통 때문에 솔로몬 행각이라고 불렸던 곳입니다. 이런 곳에서 베드로와 그 일행들이 병 고침과 말씀을 전했으니 성전을 관리하는 당국으로써는 매우 거북했을 것입니다.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라고 누가가 이야기하는 것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곳에 참가하는 것을 당국이 싫어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병 고침을 받고 말씀을 듣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당국의 비판과 분노를 살 수밖에 없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따랐다는 것은 다시 한번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5:15-16,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우리는 여기서 치유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처럼 사도들의 사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치유는 단순히 의료적 필요가 긴박한 사람들에게 그것을 제공해 주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크게 보면 그것도 포함되지만 그게 핵심은 아닙니다. 치유의 핵심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와서 새로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원래의 창조와 깊은 연속성을 갖는 새 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이고, 원래의 창조 안에서 몸과 삶이 회복되는 것이며, 그 능력과 특성상 새로운 어떤 일이 진행 중임을 보여 주는 것이 치유입니다. 그런데 새 능력이 일어날 때, 치유되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없지만 현재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불안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혹시나 그들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잃어버릴까봐 걱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치유와 사도들의 치유는 어느 특정한 시간과 특정한 장소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 시기에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의 그림자가 사람들 위에 드리우면 그들의 병이 나았는지, 왜 지금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지 우리들은 모릅니다. 또한 바울이 에베소에서 병자들을 낫게 하려고 손수건을 가져다가 그들 위에 얹었는데(19:12) 다른 곳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이 왜 거기서는 일어났는지 우리들은 모릅니다. 몇 장 뒤에서 왜 야고보는 죽고 베드로는 빠져나오는지 우리들은 모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우리들이 알 수 없는 이상한 부분이 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슬픔과 부패와 죽음이 있는 현 시대와 새 생명과 에너지와 회복의 능력이 있는 오는 시대가 겹치는 시대에 사는 우리가 경험하는 신비 가운데 일부일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당사자의 헌신이나 거룩함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의 시대에 사람들은 하나님은 원하는 대로 하실 수 있으며, 사람들이 기도하고 그분을 신뢰하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하신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 경우도 많고 사람들은 여전히 병들어 죽으며,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여러 슬프고 비극적인 일들이 여전히 일어난다는 사실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병이 나았다는 사실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는 몇 사람이 아주 이상한 이야기를 하고 술에 취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이 구체적이고 결정적으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누가가 본문에서 하고 싶은 논증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관리하는 당국자들이 분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그들에게 정치적이나 경제적으로 버팀목이 되고 있는 곳인데 그 성전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데 성전 바로 앞에서 사도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고 하니 이들이 분노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날에도 우리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여러 가지 사역을 하다보면 반대 세력에 부딪힐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현재 다른 세력이 점령하고 있는 영역을 우리가 침범해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담대하게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본문처럼 하나님의 능력이 작용할 것이고 사람들도 결국에는 그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나는 복음을 전할 때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했는지를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만약에 없다면 그것을 구하면 될 것이고 있었다면 그 영광의 체험을 계속 간구하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