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사도행전강해]#27. 7:54-8:3.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다"
오늘 본문은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가 된 스데반이 순교를 하는 내용입니다. ‘순교자’란 ‘martyr', ‘증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믿음을 위해 죽는 사람을 ‘순교자’라고 부르는가? 믿음에 의해 죽을 각오가 되었다는 것은, 이 믿음이 그저 사상이나 종교적 감흥이 아니라 살아 있는 진리 그 자체이며 생명보다 더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임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약 200년 전에 시리아의 셀루쿠즈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인 에피파레스왕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을 훼손했고 유대인들에게 율법과 조상들의 삶의 형식을 버리게 했으며, 심지어 율법에서 금하는 돼지고기를 먹게 하고 성전에 제우스 동상을 세우는 등 유대인들을 박해했습니다. 이에 수많은 유대인들은 저항했고 또한 많은 순교자가 생겨났습니다. 이 당시 이들에게는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을 위하여 순교하는 자들을 다시 부활시킬 것이라’는 부활 사상이 생겨났습니다. 특히 외경인 마카비서에는 그들이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고 무슨 말을 하고 죽었는지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믿음, 특히 마지막 날에 누릴 부활에 대한 믿음을 증언했으며, 자신을 고문하는 사람은 혹독한 형벌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저버리셨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분이 전능하신 능력으로 어떻게 너와 네 후손들을 고문하실지 한번 지켜보아라!”라고 섬뜩한 말을 했던 것입니다. 이는 믿음과 삶의 방식 때문에 고문당하고 죽음을 당한 유대인들의 전형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순교는 전형적인 유대인들의 순교와는 다르다는 것을 누가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는 스데반뿐만 아니라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세대를 살았지만, 순교하는 순간에 통상 유대인들이 죽을 때 하는 섬뜩한 복수의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스데반처럼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유대교의 전통이 뒤집혀진 사건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순교자는 자신을 고문하고 처형하는 사람들을 향해 저주와 심판 대신에 축복과 용서를 기도했다는 것을 누가가 말함으로써 기독교는 이런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7:55-56,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스데반은 지금 두 차원의 세계의 경계선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간인 하늘과 우리 인간들의 공간인 땅, 그러므로 스데반은 두 차원의 세계를 다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차원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까지 유대인들은 성전을 하늘과 땅이 만나는 장소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하늘과 땅이 예수님과 그 추종자들 안에서 하나가 된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누가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즉, 성전은 우리들 마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봅시다. 우리도 스데반처럼 두 차원의 세계를 다 보는 순간이 되면 순교할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럼 기독교 역사에서 수많은 순교자가 나왔는데 이들도 다 스데반처럼 두 차원의 세계를 다 보았기 때문에 담대하게 순교를 했을까? 하는 의문도 생깁니다.
7:59-60,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못 박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눅 23:34). 그러면 스데반을 포함하여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정말로 실천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의 순교는 새로운 종교의 탄생을 널리 선포하고 있는 사건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유대교의 순교자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런 스데반의 모습에서 유대인들은 더 심한 분노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목격한 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스데반의 죽음에서 예수님이 생각났을 것이며 아마도 소름이 돋았을 것입니다.
8: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누가는 7:58에서 사울을 처음 등장을 시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사울의 역할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박해를 통해 복음이 다른 세계로 전파가 되었다고 누가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박해가 없었다면 기독교가 오늘날 전 세계로 전파가 되었을까? 그러면 기독교에 있어서 박해와 고난은 필수적인가?
덴마크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의 책인 ‘고난의 복음’에서 “예수님이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웠을 때 완전하게 되었다면(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믿음에 이른 그리스도인이 완전해지려면 예수님처럼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통하여 이 세상과 이 세상의 것들로부터 젖을 떼야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일로부터, 세상에 의해 쓰라림을 당하는 일로부터 젖을 떼야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영원을 위한 배움이 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고난의 학교는 세상에 대하여 죽는 것이고 그 수업을 통해 순종을 배운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고난 없이 하나님께 순종을 배우는 것이 가능하다면,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은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울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키에르케고로는 말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기독교는 박해와 고난으로 생겨난 종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8: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표적이 되어 추적당하고 주변지역을 흩어지자, 사울이라는 청년이 최대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넣으려고 열안이 되어서 집에 들어가서 남자와 여자 할 것 없이 옥에 넣었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그런 문제가 되는 사건에 대해 사람들을 체포를 할 땐 주동자나 적극 가담자들을 체포를 하는데 이 운동의 초기부터 여자들까지도 체포가 되었다고 누가가 말하고 있는 의도는 무엇일까? 그만큼 기독교가 탄생할 때 유대교에서는 위기의식을 느꼈던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들에게 고난이란 것이 찾아오고 있는가? 그러면 우리들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면서 이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 가를 묵상을 해보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명심할 것은 등 따습고 배부르면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는 것을 성경은 무수히 말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과연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