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사도행전강해]#29. 8:26-40. "에디오피아 내시"
아마도 빌립은 사마리아에서 큰 부흥을 체험하고 계속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자는 한창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고 있는 빌립에게 아무도 없는 유다 남쪽의 광야로 가라고 했습니다.
8:26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사마리아는 예루살렘 북쪽에 위치해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자는 빌립으로 하여금 이 사마리아를 떠나 저 남쪽 이집트 가까운 곳까지 가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도대체 이 빈 광야에 누가 있다고 이런 곳에 가게 하시는가 생각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한 사람의 흑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던 것입니다.
8:27-28,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디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그 당시 고대 근동에서는 국가의 공직을 맡기 위해서 거세하는 일은 흔한 것이었습니다. 그 내시가 여왕의 재정장관이라면 고위 공직자입니다. 그가 유대인인 확률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또한 내시였기 때문에 개종한 유대인이었을 가능성도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경계선 밖에 있는 이웃 사이더였고, 유대교 체제 안에서는 영원히 아웃사이더 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유대교의 하나님과 유대교의 생활 방식에 매력을 느꼈고 그래서 예배하러 예루살렘까지 먼 길을 온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고대 근동에서는 많이 사람들이 유대교에 매력을 느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그가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던 것입니다.
8:30-31,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이처럼 성경 말씀은 영안이 열리지 않고 문자적으로 해석을 하면 지금이나 그 때나 성경을 살아감에 있어서 단순한 진리에서 유익을 얻는 수준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에디오피아 내시가 의문에 맞딱뜨린 구절은 무고한 희생자로 죽임을 당하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끌려갔다”라고 예언자가 묘사한 그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초대 교회가 예언서를 어떻게 읽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단순히 여겨지는 특이한 본문들을 찾아 임의로 예수님과 연관 짓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의 연설에서 보았지만, 그들은 성경을 위대한 이야기로 인식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되어 모세와 다윗과 예언자들을 지나 현재까지 이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본문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엿보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는 어떻게 절정에 이르는가? 그리고 절정에 이르는 길에 주어진 단서와 추측들은 그 절정에 어떻게 기여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8:32-35까지 빌립은 이사야서 53장을 해석을 해주었습니다. 아사야는 유배를 간 이스라엘의 운명에 대해 이스라엘이 이방의 빛이 되지 못하고 심지어 그 자신도 빛 가운데 걷지 못했음에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약속과 목적에 대해 깊이 묵상했던 것입니다. 그런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것은 이스라엘의 임무를 완성하고, 이스라엘이 있는 자리에 와서 이스라엘과 온 세상을 위해 그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세상 나라들과 하나님의 백성이 주는 수치와 멸시를 자신의 몸으로 감당하고 이 세상의 사악함에 짓눌려 죽는 종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다는 것을 그는 깨달은 것입니다. 이사야는 유배된 이스라엘의 오랜 밤이 누구를 통해 어떻게 새벽을 맞이하는지, 온 세상을 위한 축복의 약속, 즉 새 언약(사 54장)과 새 창조(사 55장)의 약속은 누구를 통해 어떻게 성취되는지, 또한 아웃사이더들과 외국인들과 내시들에게까지 내리는 축복(사 56장)은 누구를 통해 어떻게 임하는지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제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빌립은 선언했던 것입니다. 빌립의 말을 들은 에디오피아의 내시가 흥분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8:38-38,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에디오피아 내시는 이제까지 이중으로 배제되었다가 이제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으니 그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했을 것입니다. 그가 기뻐하며 가던 길을 가면서 느끼는 그 기분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 것입니다. 그것이 첫사랑의 경험인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감정을 잘 유지하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8:40,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라에 이르니라 “ 복음 전도자가 된 빌립 집사의 행적을 마무리하면서 본문은 끝납니다. 이는 이방인들을 위한 탁월한 선교사가 될 사울의 회심과 고넬료를 방문한 베드로의 이야기를 예견하며 비유대교 사회에 복음을 전하는 주제를 계속 이어가는 이야기의 서막을 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누가가 말한 이 위대한 이야기에서 믿음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은 첫 비유대인이 아프리카 출신 흑인이었다는 사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누가는 초대교회가 어떻게 발전하고 자랐는지, 특히 그들이 어떻게 성경을 읽었는지에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복음이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기 시작하는 시점에 이 이야기를 들여줌으로써, 우리가 어디를 가든, 어떤 문화권을 접하든, 또한 우리가 어떤 박해와 억압을 만나든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실현되게 하시는 예수님의 메시지는 그 필요를 채울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강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복음 사역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