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사도행전강해]#33 9:32-43. "베드로의 이야기"
우리들은 성경을 보면서 특히 치유 사건이나 죽은 사람을 살리신 일들을 보면서 의문이 드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왜 이 사람일까? 예수님 또한 그 당시 많은 문둥병과 중풍병자가 있었을 텐데 오랫동안 살아있으면서 그들을 치유하고 귀신 들린 자들을 고쳐주셨다면 팔레스타인 일대는 그야말로 그 당시 최고의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만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세상에 병 고침과 귀신을 물리치시려고 오신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또한 성령 세례를 받고 많은 이적과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왜 베드로는 다른 죽은 사람은 방문하지 않고 이 사람을 방문했을까? 그 지역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애니아 말고도 많았을 텐데 왜 애니아만 치유받았을까? 그러면 성경은 이런 사건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일까?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룻다와 욥바에서 행한 기적과 이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9:32, “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우리는 애니아가 예수님을 따르는 추종자인지는 모릅니다 다만 그의 이름 애니아는 ‘칭찬받는 자’란 뜻이며, 그리고 8 년 동안 중풍병으로 침상에 누워있었다면 증세가 심하다는 것을 본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누가는 굳이 애니아란 이름을 밝히고 8 년이란 기간을 밝힌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의 은혜가 극적으로 임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도 있을 것입니다. 애니아의 이름의 뜻이 ‘부랑자나 도적’이라면 문맥상 이상하지 않을까?
9:34-35,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 대 곧 일어나니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베드로는 3장에서 일어난 치유 사건 이후에 본문에서 병 고침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병 고침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병 고침 사역을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도구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는 신약 성경이 나오기 전이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메시아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이런 병 고침과 기적을 도구로 삼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신, 구약 성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구태여 병 고침과 기적을 통하여 복음을 전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9:36-37,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도르가는 눈에 띄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이 처한 환경 안에서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한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도루가처럼 믿음과 희망으로 살면서 인생의 기쁨을 만끽하고 당연히 슬픔도 감당하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자그마한 일을 통해 자신이 속한 영역에서 복음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이 초기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교회의 중심을 형성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9:38,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그들의 간청이 다비다를 살아나게 해 달라는 것인지 아니면 죽었으니 와서 영혼을 위로하는 기도를 해 달라는 것인지 또 무조건 와 달라고 간청한 것인지 누가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9:39,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누가는 왜 과부들을 등장시켰을까? 6장에서 보았던 것처럼 과부들은 교회의 삶 안에서 아주 중요한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인생의 큰 슬픔 하나를 지고 사는 이 사람들이 교회에서 지원을 받는 것만이 아니라 교회에 중요한 기여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 당시는 대량 생산을 못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일일이 바느질과 뜨개질로 공동체에 필요를 담당했을 그들을 생각해보세요 묵묵히 가슴에는 아픔을 간직하면서 하나님 백성들을 위하여 일하는 그들의 모습이 아련하게 떠오릅니다.
9:41-42,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결론은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이 하는 모든 일이 복음을 전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베드로 사도처럼 병 고침과 죽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은 없지만 도르가처럼 일상생활에서 하나님 백성다운 삶을 살 수는 있는 것입니다. 도리어 베드로처럼 병 고침과 기적을 행하면 이단 우두머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 2,000 년 역사는 베드로 같은 사도들도 필요했지만 애니아와 도르가 같은 이름 없는 많은 성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도 기독교의 역사가 계속되려면 이런 성도들이 계속 교회에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교회에 중심이 되고 있는지를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