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강해

[읽기 쉬운 사도행전강해]#34. 10:1-16. "베드로의 환상"

이헌교 2022. 4. 13. 12:26

 

본문은 이제 기독교의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이방 세계로 널리 전파되는 획기적인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로마는 지금의 미국과 같이 세계의 주역이었습니다. 313년 밀라노 칙령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을 받을 무렵 기독교의 인구가 로마의 10퍼센트가 되었다고 합니다. 기독교가 그렇게나 부흥할 수 있었던 내면에는 이런 고넬료 같은 로마 군사 장교들도 일조를 했을 것입니다. 군사적 성공 위에 세워진 제국과 도시를 활보하며 일을 해내는 사람들은 당연히 군사 장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황제를 세울 수도 꺾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 군사 장교들이야말로 세계 주역인 셈입니다.

 10:1-2,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가이사랴는 요충지였습니다. 모든 상인이 그곳을 지나면서 세금을 내도록 헤롯 대왕이 건설한 항구였습니다. 로마 총독은 따뜻한 해안 지역인 이곳에 주로 머물렀고, 기온이 낮은 예루살렘에는 축제나 특별한 행사 때만 올라갔습니다. 로마 제국에도 무능한 군인들이 가는 후방이 많았지만 가이사랴는 그런 곳이 아니었습니다. 핵심 전략 지대에 있는 핵심 항구였습니다. 로마는 중동 지역의 평화에 힘썼습니다. 왜냐하면 이집트의 곡물을 운송해 와야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이사랴에 배치된 백 부장은 로마에서 신뢰받는 장교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이달리야 부대’라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로마 군대라고 하지만 이달리야 군인으로 구성되는 본부대가 있고 또 현지인으로 구성되는 보조부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넬료는 보조 부대 백 부장이 아닌 정규 로마 이달리야대의 벡 부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로마인이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믿어도 그냥 흉내만 낼 정도의 믿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온 집안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들을 많이 구제하며 항상 기도하는 그런 아주 독실한 신앙을 가진 자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선 몇 가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는데 그 하나가 ‘하나님을 경외하며’라는 표현입니다. 이방인들 중에서 율법을 배우고 하나님을 믿지만 유대교로 개종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유대교로 개종은 하지 않았지만 거의 유대인처럼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아마도 고넬료는 군인이었기 때문에 군인은 황제에 대한 충성을 일 년에 한 번씩 맹세를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할례를 받고 유대교로 개종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도 우상 숭배처럼 취급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 당시에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유대인의 회당마다 상당히 많았습니다. 나중에 바울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거의 다 이런 자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회당에는 나가지만 정식 회원은 되지 못한 상태라, 회당 안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따로 않아서 율법을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정죄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그들에게 들려온 ‘오직 예수만 믿으면 유대인이 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라는 이 선포는 바로 이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복음이었습니다. 여기에 보면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했다’고 했는데 여기서 ‘집’의 개념은 가족만이 아니라 하인이나 노예들을 다 포함했기 때문에 바로 이 집이 작은 교회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넬료가 하나님을 믿고 열심히 기도하고 또 구제도 열심히 했다면 충분한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입니다. 즉 이미 그들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이 되었다면 계속 그런 식으로 믿으면 되는 것이지 굳이 베드로를 불러서 설교를 듣고 성령을 받을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의문입니다.

우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고넬료의 신앙의 위치가 어디냐? 하는 것입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알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구약 신앙의 위치에 불과했습니다. 즉 오신 메시아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누가는 지금 이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두 가지 환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고넬료에게는 천사가 나타나 베드로를 데려오라고 하고 베드로에게는 부정한 짐승들을 가득 담은 보좌기를 내려 보내 그것을 잡아먹으라고 합니다. 고넬료의 환상이 베드로의 환상보다 직설적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환상은 내용의 차원에서만 아니라 상징의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10:12-13,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베드로는 가이사랴에서 48킬로미터 떨어진 욥바에 있었습니다. 정오에 기도하기 위해 짬을 냈습니다. 그때 환상을 보는데, 거대한 돛이나 보자기 같은 것이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거기에는 먹고 싶은 짐승들도 있었지만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분명히 먹고 싶지 않을 짐승들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우리는 유대인의 음식법 중에서 한 가지 기본 사항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은 돼지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는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유대인이 먹을 수 없는 육류는 다양했습니다. 레위기 11장을 보면 그 목록이 나오는데, 나중 세대들은 그에 대해 많은 토론을 했다고 합니다. 그 기원이 어찌 되었든 이 음식법은 유대인과 비유대인을 구분해 주는 척도가 되었습니다. 유대인이 비유대인과 함께 먹으며 식탁 교제를 하는 것을 금지하였던 이유는 분명합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같이 앉아서 함께 음식을 먹는 사람은 ‘가족’입니다. 그런데 유대인 ‘가족’은 구별되도록 하나님께 부름 받았고,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은혜를 온 세상에 증언하도록 부름 받았기 때문에, 이 세상과 타협해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부정하고 정결한 음식 규례를 만들었던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이 바뀐 것입니다.

 10:15-16,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지금까지 베드로는 율법에 충실했고 부정한 것을 먹어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그 당시 거룩한 유대인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는 것을 누가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음식 규례는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를 구별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차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택한 백성은 언제나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중간에 막힌 담”(엡 2:14)을 허물어 버리셨으므로 이러한 구별은 영원히 폐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답이 세 번 반복된 후 그 그릇이 하늘로 끌려 올려 갔는 것은 베드로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만약에 베드로가 이런 환상을 꾸지 않았다면 고넬료가 보낸 심부름꾼을 받아들였을까?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치밀하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지금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 또한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 속의 한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하여 예비 작업을 많이 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이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의 찬양과 기도를 드리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