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사도행전강해]#46. 14:1-7. "이고니온에 가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일상에서 보기 어려워진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박해입니다. 사람들을 선동하여 기독교인들을 미워하게 만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표징과 놀라운 일도 거의 없습니다. 바울의 시대를 기준으로 표현하자면 딱히 치유되는 사람도 없고, 돌을 맞는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즉, 요한 계시록 3장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처럼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 복음을 들은 그 당시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기뻐했고, 어떤 사람들은 크게 분노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크게 기뻐한 사람들의 후손 들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바울이 전한 주요 메시지는 메시아이신 예수님 안에서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오래전에 하신 약속이, 먼저 이스라엘을 위해, 그다음으로 온 세상을 위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신앙은 바울이 전한 메시지보다는 죽으면 ‘천국’에 갈 것이라는 도피주의적 희망을 안고 살면서 몇 가지 도덕만 지키면 된다는 식으로 변절이 된 것이 아닌가를 한 번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고니온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14:1-2,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 전도를 할 때부터 이들의 호칭이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바울과 바나바에 대하여 처음으로 ‘사도’라는 말이 쓰여지고 있습니다. 원래 ‘사도’라는 직함으로 불린 사람들은 지금까지는 예수님의 열한 제자였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추가된 맛디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고니온에서 전도하던 바울과 바나바에게도 ‘사도’라는 칭호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원래 ‘사도’라는 직책은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사역을 처음부터 다 본 사람 중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본 사람으로서 예수님이 세운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음의 진리를 책임지는 사람으로 세우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반드시 사도들의 증거 위에서 세워져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의미는 예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을 지칭합니다. 즉 예수님으로부터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특명 대사로 보냄을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과 바나바에 대하여 ‘사도’라는 말을 쓴 것은 교회의 기초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예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복음의 사신이라는 의미가 더 강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이고니온이 어딘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1차전도 대상지는 구브로 섬과 터키 중부 지역이었습니다. 지금은 터키가 회교국이 되어서 교회가 있던 자리는 모두 유적지로 남고 말았지만, 이 당시만 해도 기독교가 가장 번창하고 믿는 사람들이 가장 많았던 곳입니다. 다시 말해 바울의 선교가 가장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던 곳이었습니다. 특히 여기 이고니온과 루스드라는 바울이 1차, 2차, 3차전도 여행 때 다 들렀던 곳이고 나중에 바울의 갈라디아서를 쓰는 대상이 되는 곳이기도 한 곳입니다. 로마 역사를 보면 순교자가 가장 많이 나왔던 곳도 바로 이 소아시아 지역이었고, 다른 여타 지역에 비해 종교지도자가 가장 많이 배출되었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곳 이고니온에서도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었고 분노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누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 일행이 회당에서 먼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스라엘, 즉 유대와 팔레스타인과 온 세상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에게 가능한 한 빨리 그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특별하다’는 의식이 너무 강해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이방인들도 포함이 된다는 것에 거부감을 표출한 것입니다.
14:3-4,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에서 오래 동안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표적과 기사를 행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세요 그들이 메시지만 전했다면 그곳에 오래 머물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처럼 병 고침 등의 이적을 행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회당은 단순히 예배 장소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각 지역의 유대인들이 모이는 지역 사회 쉼터였습니다. 함께 모여서 온갖 사안들을 제기하고 의논하는 장소였습니다. 오늘날과 비교하자면 ‘종교적 건물’보다는 오히려 ‘공공 광장’에 가까울 것입니다. 즉, 시민 생활과 관련된 모든 것의 네트워크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바울과 바나바처럼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를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려면 우선 우리 사회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평화, 정의, 자유, 건강, 사랑도 있지만 우리 내면에는 많은 돈, 좋은 집, 좋은 차, 아름다운 연애로도 채울 수 없는 마음의 굶주림을 채우기 바랄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에게 바울과 바나바가 했던 것처럼 즉, 이들에게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들려준 것처럼 그 이야기를 예수님으로 이끌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 삶에서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인간이신 분,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를 간직하신 분, 우리의 모든 굶주림을 채우는 살아 있는 빵이신 그분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그냥 말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어려운 부분입니다. 우리들이 ‘실제 삶’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한 매주 한두 시간의 공 예배를 유지하려 애쓰는 교회가 된다면, 우리는 정말로 일요일 아침이면 밭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나머지 시간에는 되새김질만 하는 종교적 소 떼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사도들이 그들이 속한 유대교 사회에서 하고자 했던 일을 우리 사회에서 하려고 우리가 정말로 애쓴다면, 교회는 물론이고 사회 또한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 말씀처럼 복음이 살아나면 기득권의 도전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분노할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들은 바울과 바나바처럼 올바른 메시지를 전하고 그 메시지대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결국 바울과 바나바는 기득권들의 분노함으로써 이고니온에서 도망하여 루스드라와 더베에 복음을 전하러 갑니다. 이 시간 나는 바울과 바나바처럼 하나님의 충성된 종처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