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사도행전강해]#49. 15:1-11. "할례 논쟁"
15장에서는 제2차 선교 여행을 앞두고 교회 조직 내부에서 중대한 갈등이 일어난 것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 주요 의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의 율법(할례)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라고 답한다면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한 종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라고 답한다면 기독교는 주님께서 명하신 대로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종교로 확장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방인의 구원과 연관하여 바울 일행과 유대인 신자들 사이에 논쟁을 벌이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공의회가 소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15:1-2,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처음 예수 믿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유대교도 믿으면서 얼마든지 또 예수를 믿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할례를 다 받은 상태에서 예수를 믿으면서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할례를 받지 않았는데도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전혀 생각도 해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모세의 율법도 지키고 예수도 믿는 일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할례 받는 것을 요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모세의 율법도 지키도록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을 전했는데, 이방인들은 그것을 믿고 성령을 받아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 신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과는 완전히 이질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이 복음을 전한 갈릴리 지역에나 안디옥에서 전통적인 유대교식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출현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예수만 믿어서는 안 되고 먼저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킨 후에 예수를 믿어야 이것이 올바른 신앙이라고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결국 이 할례 문제로 인하여 바울 일행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 교회로 향하게 됩니다.
15:4-5,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할례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 율법과 관습을 지키기 위해 죽기까지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의 표지이며 언약의 표지라고 이들은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할례파’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15장은 단순히 ‘전통’ 대 ‘혁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15장은 11장에서 이미 확립된 원칙을 재주장하고 점검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내심으로써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성취하셨기 때문에 이제 아무런 차별 없이 누구나 언약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 핵심입니다. 이것은 특정 민족 집단에 속하는 문제가 아니고 그 민족이 아무리 신성하고, 선택받았고, 하나님의 임재로 복을 받았고, 그분의 약속을 세상에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그 약속을 사적 소유로 간직할 것이 아니라 전달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지킨 ‘전통’은 이만큼의 의미를 지녔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15:7-9,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만약에 베드로가 고넬료의 사건이 없었다면 이렇게 증언을 할 수 있었을까? 이처럼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하나하나 철저하게 준비를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냥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15: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본문에서 ‘멍에’는 무엇일까? 구약의 율법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의 멍에는 무엇일까? 구원을 받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이 아닐까? 새벽기도, 주일 성수, 십일조, 전도 그래도 뭔가 부족하다 싶으면 금식기도도 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구원을 이런 것으로 받는 것일까에 대해 누가는 11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15: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그렇습니다 구원은 ‘은혜’의 문제인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민족 정체성의 문제였다면, 그리고 회심자들이 반드시 그 정체성을 취해야 한다면, 은혜는 더 이상 은혜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복음을 너무나도 쉽게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2,000년의 역사를 통해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우리 인간들의 탐욕과 권력 때문에 빚어진 결과물로 많은 전쟁과 죽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우리들이 복음에 대해서 완벽하게 받아들인다면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이 될까? 아마도 하나님의 살롬이 넘치는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복음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