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갈라디아서강해]#18. 5:7-12. "거세 하라"
바울은 고린도전서 9:24에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육상 경기와 같다고 비유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또한 육상경기를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 면에서 갈라디아교인들은 처음에는 순조롭게 출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경기도중 어떤 사람들이 정치적이거나 다른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트랙으로 뛰어들어 경기 중의 선수들을 방해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온전하고 참된 하나님의 백성의 구성원이 되려면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사람들이란 것입니다.
5:7-8,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바울은 본문에서 그 진리의 터를 흔들고 복음의 자유를 빼앗으려는 자들의 권면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1:6)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은혜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유대주의자들의 다른 교훈에 설득되어 거짓 복음을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 ‘선동자들’의 설득에 넘어가 이제는 복음, 즉 메시아가 죽었다가 일으켜지신 것을 믿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바울은 지금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5:9-10,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누룩은 적지만 강력합니다. 누룩 알갱이 몇 개만 넣어도 반죽 전체가 부풀어 오를 것입니다. 한쪽만 부푸는 것이 아니라 즉시 전체에 효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누룩을 넣지 않은 빵으로 유월절을 지키는 전통이 있습니다. 유월절 절기에는 지금도 누룩이 유대인의 부엌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합니다. 바울이 누룩의 비유를 통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이것입니다. 만약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 한 가지 문제 즉 할례 문제를 양보한다면, 다른 것들은 전부, 즉 율법 전체가 누룩처럼 번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복음을 혼동하게 만든 사람에 대해 판결을 내립니다. 바울은 “주 안에서”확신한다는 뜻은 바울이 이 문제를 두고 기도하고 씨름하면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생각을 수정할 것이라는 든든한 확신에 도달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이런 고민을 안겨 준 사람에게는, 그가 누구든지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누구든지”라고 할 때, 이는 예루살렘 교회 안에 있는 지도자 중 한 사람을 가리키는 암호일 가능성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바울이 이름을 알지 못하거나 언급하고 싶지 않은 지역 교회의 한 지도자를 넌지시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5:11-12,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바울 또한 회심하기 이전에는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에 합류하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왜 그가 아직까지 박해를 받았겠는가? 바울은 어디를 가든 자신들을 망신시킨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에게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를 전하는 바울의 메시지를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생각하고 기대하고 있던 메시아는 다윗과 같은 강력한 힘과 능력을 가지고 이방세력들을 몰아내고 팔레스타인 일대를 다스리는 것이었는데, 바울이 전하는 메시아는 도리어 이방세력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이 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바울의 편지에서 늘 주장했듯이 바울의 복음에서 심장부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충격적인 단어를 사용합니다. 선동자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포피를 잘라 내고 싶어 하는데 만일 그들이 남성 성기 중 일부를 잘라 내는 일에 그토록 혈안이 되어 있다면, 왜 전체를 그렇게 하지 않는가?라고 반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거세를 해버리라는 것입니다. 거세해 버리면 그 일부만 잘라 내는 것보다 훨씬 더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극단적 결론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극도의 반어법을 구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곳이든 저곳이든 신체의 일부를 잘라 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겠느냐고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여러 종교에서 시행하는 것처럼 몸에 일종의 의식적인 부적을 남기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즉 가끔 종교의식으로 행하던 거세와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거세한 남자는 당연히 자녀를 갖지 못할 것입니다. 바울이 원하는 것은, 갈라디아인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힘을 잃고, 더는 그들을 좌지우지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그들에게 선전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교활한 핍박에 맞서 기독교 공동체의 생명과 정신을 수호하기 위해 싸워 본 사람은 누구나 바울이 직면한 상황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이해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메시지를 확실하게 전하는 유일한 방법은 생생한 언어와 다채로운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을 깨어 있게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충격을 주어 진짜 쟁점이 무엇인지 직시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복음을 전할 때 생생한 언어와 다채로운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