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갈라디아서강해]#23. 6:11-18. "마지막 인사"
오늘 본문 말씀은 본서의 결론 부분입니다. 마지막 권고와 축복이 서술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서신을 다른 사람에게 불러주어 쓰게 하고(롬 16:22) 마지막 인사라고도 할 수 있는 결론 부분은 자기가 썼습니다(고전 16:21-24, 골 4:18). 그러나 본서는 바울 자신이 직접 긴 결론 부분을 썼고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6: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바울이 큰 글자로 쓴 것은 시력이 나빴기 때문에 글자를 크게 쓸 수밖에 없었다거나 바울이 천막을 만드는 일을 했기 때문에 글씨를 잘 쓰지 못했다거나 또는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대문자로 썼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바울 자신이 직접 쓴다는 진실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특별히 주의를 촉구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마지막 말은 여전히 따뜻하고 열정적입니다. 논증의 불길도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편지의 여러 부분을 하나로 묶으면서, 확고하고 진지한 결론으로 이끌어 줍니다. 한두 단락 앞에서처럼, 이 논쟁에서 중요한 것은 십자가입니다. 바울이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6:12-13,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할례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십자가는 위대한 분리를 나타냅니다. 교회와 세상 사이의 분리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메시아를 위한 박해에 직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분리입니다. ‘선동자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몸에 아브라함의 인종적 가족에 속해 있음을 나타내는 표지를 남기려고 열심이었습니다. 바울은 자기 몸에 있는 흔적 중에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 충성한 결과로 받은 고난의 상처뿐이라고 말합니다(17절). 만약 당신의 몸의 흔적을 갖기 원한다면, 중요한 것은 할례 시행자가 낸 칼의 표지가 아니라 십자가의 표지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표지는 핍박의 흔적이요 ‘예수의 상처’다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핍박의 흔적들은 ‘선동자들’이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동료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과 교제하는 타협을 저지르지 않았는지 증명해 보이라는 압력을 받다가, 이 압력을 이방인 회심자들에게 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5:3에서 말했듯이 할례는 어떤 사람이 율법 전체를 지키려고 할 경우에만 의미가 있음을 말했었습니다. 그런데 ‘선동자들’은 오로지 이 한 가지, 다른 사람들의 표피를 잘나 냄으로써 자신들을 지키는 데만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6:14-15,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리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바울에게 십자가는 모든 것의 중심에 있고, 십자가가 갈라디아서 전체에서 그의 생각을 이끌어 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새로운 세계가 약속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 예수를 본 사람이, 십자가에서 이미 사형 선고된 가치관, 신분 표지, 세상적인 삶의 방식에 매달리려고 하는가라고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할례도 아니고 무할례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몸에 유대인의 표시를 남기는 것도, 이방인이어서 그런 표시를 지니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세상 위에 새로운 세계를 펼쳐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통해 그 축복, 새로운 생명, 미래의 약속에 동등하게 참여하도록 모든 사람을 초청하신다는 것입니다.
6:16-18,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련에 있을지어다 아멘”바울은 본문에서 믿음으로 반응하는 이들에게는 크고 영예로운 이름이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아브라함의 가족입니다(3장). 그들은 이스마엘의 가족이 아니라 이삭의 가족입니다(4장). 그들은 서로를 향한 사랑 속에서 율법을 준수한다는 것입니다(5장).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들은 이제 하나님의 이스라엘 세상을 비추는 하나님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창조 세계의 기준에 따라 살면서, 하나님의 평화와 자비에 동참하며 그것을 세상으로 가져오도록 부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편지의 마지막 문장은 갈라디아 교인들은 물론이고 이 글을 읽는 우리 모두에게 주는 축복문입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온통 은혜, 우리 주 메시아 예수의 은혜다. 하나님은 메시아 안에서 구원 계획을 주도하셨다. 바울의 사도직과 마찬가지로(1장), 복음은 사람에게서 기원하지 않으며, 메시아의 백성에 속하는 자격은 인간적인 범주로 규정되지 않는다. 은혜는 뻗어 나가 전 세계를 포용한다. 이런 표용의 표지는 육체에 있는 흔적이 아니라 영의 임재와 기쁨이다. 이 기쁨은 여전히 갈라디아서의 메시지가 필요한 현대 교회와 세상에서, 지금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장차 믿음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보상받고, 인내가 마지막 추수로 보상받으며. 간절한 희망이 성취로 보상받을 때까지 죽 그럴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과연 영의 임재와 기쁨을 누리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