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고린도후서강해]#1. 1:1-7. "인사말"
본본서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메시아, 온 세상의 주이신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새로운 부활 생명을 통해 오는 신비하고 고귀한 위로입니다. 이 편지에서 바울은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고난, 즉 자기 자신과 모든 메시아의 백성들의 고난의 눈높이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의 바울은 부아가 났고 빌립보서의 바울이 기뻐한다면, 고린도후서에서는 그의 깊은 슬픔, 그리고 최근에 자신이 겪은 고난의 쓰라린 상처가 크게 두드러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대체 무엇이 바울의 몸은 물론이고, 앞으로 우리가 보게 되듯이, 그가 편지를 쓰는 방식에까지 흔적을 남길 만큼 강한 고통을 안겨 주었을까? 또한 그가 겪은 일은 고린도 교회와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 모든 것을 편지가 전개되면서 우리가 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1:1-2,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본문의 인사말은 고대 세계의 표준적인 편지 작성법을 차용한 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본문에서 복음의 특별한 의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맨 먼저 독자층이 확장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에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그리스도인만 호명했습니다(고전 1:2). 하지만 2년 정도의 짧은 기간에, 복음은 고린도로부터 ‘아가야’라고 알려진 그리스 남부의 다른 지역까지 퍼졌던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역사하는 복음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1:3-4,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바울은 대개 편지의 본론을 기도로 시작합니다. 그 기도에서 바울은 자기가 독자들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핵심 주제를 하나님 앞에 내놓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그것이 무엇인지 본문에서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위로”라는 단어를 다음 절에서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이 사용하는 단어는 ‘위로’보다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어떤 사람을 가까이 오도록 부르다’. ‘강하게 호소하거나 권면하다’ 혹은 ‘환대하거나 다정하게 대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 단어의 전반적인 개념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의 기분과 상황을 변화시키는 말을 하고, 다음 순간, 다음 날, 남은 생애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를 바꾸어 놓을 용기와 새로운 희망, 새로운 방향, 새로운 안목을 준다는 것입니다. 즉 바울이 본문에서 여러 차례 되풀이하여 사용하는 단어인 “위로”는 사람들이 처해 있는 그곳에서 그들을 만나, 새로운 희망,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길을 넉넉히 볼 수 있는 곳으로 그들을 데려간다는 뜻입니다.
1:5-6,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본문의 핵심은, 즉 복음의 핵심은 메시아에게 해당되는 그 일이 그분의 백성들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단지 강력한 관념이나 신념이 아니라 엄연한 경험으로 존재하는 핵심 원리인 것입니다. 본서는 이런 원리가 계속 이어져 나오고 있는 서신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메시아께서 죽으셨기에, 그분의 백성들도 그분 안에서 죽어서 그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입니다. 또 메시아께서 다시 사셨기에, 그분의 백성들도 그분 안에서 다시 살아나서 위로하고 치유하는 부활의 능력을 이미 현재에서 경험하고, 이제 메시아께서 소유하신 것과 같은 새로운 부활의 몸이 장차 자신들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편지 내용 대부분의 뼈대인 것입니다.
1: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본문을 비롯한 고린도후서 곳곳에서 메시아와 그분의 백성들 사이의 교환을 볼 수 있듯이 사도가 이 편지를 보내는 교회 사이에도 유사한 교환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난을 겪을 때, 교회는 위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위로를 받을 때, 그 위로는 그들에게도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 공동체의 특징인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 은 사랑인 것입니다. 밖으로 흘러나와 메시아 안에서 세상을 포용하는 하나님의 사랑, 자신의 수고로 인해 탄생한 공동체를 향해 ‘메시아 안에서’ 가는 사도의 사랑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이 교환 양식은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나는 일과 바울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은 서로 엮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 자신에게서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기도는 하나님을 “자비의 아버지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으로 부각시킵니다. 또 이 편지 곳곳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신비하고 고통스러운 일들을 통해 몸소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메시아와 복음을 통해 일어나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 편지 곳곳에서 우리는 바울의 깊은 고난과 슬픔의 경험이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비전으로 그를 이끌었다는 인식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메시아에 의해 형성된 그 비전은 빛과 사랑의 비전입니다. 그 빛은 어떻게 비극에서 영광으로 나아가는지를 보여주고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음을, 그 사실이 현재에 위로를 줄 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변치 않고 남아서 승리로 이끌 것임을 알게 해 줄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위로의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