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디모데전서강해]#18. 6:11-16.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오늘 본문은 디모데에게 거짓 교사에 대해 언급한 후 디모데가 구해야 할 것을 열거하고 믿음의 싸움을 용감히 싸우라고 격려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우선 1세기 당시의 문화에 대해 알아야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가 좋을 것입니다. 그 당시 볼거리가 크게 없었기 때문에 황제의 등장이 굉장히 멋지고 구경할 만한 행사여서 구경꾼이 오랫동안 기억하도록 왕의 위엄을 장엄히 드러냈다고 합니다. 제국의 대부분이 이미 황제를 신으로 혹은 적어도 ’신의 아들‘로 경배했으므로 그의 ’나타남‘은 중요하고 볼 만한 공식 방문이자 신적 계시의 순간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개념을 압축해서 보여 주는 단어가 ’에피파니아‘였고,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의 ’예수 공현 축일‘(Epiphany)이라는 단어가 나왔다고 합니다. 이것이 14절에서 사용하는 단어로 내가 ‘왕으로 나타나심’이라 번역한 것입니다. 바울은 미래에 일어날 예수님의 ‘나타나심’에 대해 말할 때, 청중이 보통 로마 황제와 연관 짓는 어휘를 의도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 세계에서 이 단어를 쓰는 사람이나 이 단어를 읽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것이 얼마나 체제 전복적인지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저 암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거듭 그 내용을 이야기합니다. 왕이신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한 분이신 참 하나님, 만왕의 왕, 만주의 주, 궁극적인 주권자를 섬기는 일에 가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모든 왕이 그분 앞에 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 아들의 ‘나타나심’은 궁극적으로 인정받을 유일한 왕의 ‘타나나심’이라는 것입니다.
6: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본문에서 바울은 디모데를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 부르면서 경건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얻으려는 거짓 교사들과는 달리 디모데는 세속적인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은 영적으로 성숙한 신앙인임을 강조합니다. 원래 하나님의 사람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칭호로서 예언자처럼 하나님에 의해 부름을 받은 사역자들을 가리켰습니다(삼상 2:27, 왕상 12:22). 그러면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피할 것과 따르는 것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본문을 읽고 ‘우리가 더 나은 행동을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물론 그 말도 맞지만 이 모든 내용의 요점은, 이는 왕이 나타나실 때를 대비하는 것이기도 하고, 현재 그분의 군대에 입대하기 위한 체력 단련법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황제는 자기 군대에서 싸우도록 사람들을 소환했고 그들은 군 복무를 하겠다고 서명할 때 황제에게 충성하겠다고 공개 선언을 해야 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의미로 이제 예수님이 그분의 군대에서 싸우도록 사람들을 소환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전쟁은 무기와 살상이 있는 그런 전쟁이 아니라, 사랑과 인내와 온유가 있는 전쟁이기 때문에 이는 “믿음의 선한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디도데에게 말합니다.
6:12-14,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선한 싸움”은 ‘고귀한’ 혹은 ‘아름다운’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이는 그가 사용하는 단어 중 찬양의 의미를 가장 많이 담은 단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 선한 싸움을 하겠다고 서명하는 것은, ‘대중 앞에서 선한 고백’을,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세례 때의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황제의 대리인인 본디오 빌라도 앞에 서서, 자신은 참으로 유대인의 왕, 즉 메시아, 세상의 진정한 주라고 선언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앞 11절과 14절의 명령은 단지 그들 자신을 위해 새로운 방식으로 행동하는 법을 배우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진정한 왕의 군대에 속한 탁월한 군인들의 필수요건이란 것입니다.
6:15-16,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빚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하나님의 능력과 존귀가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본문은 구약 성경에서 인용되었고 유대인 회당 예배에서 신앙고백으로 암송되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교인들은 그리스도께서 곧 재림하실 것이라고 확신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정해진 때, 즉 하나님이 자신이 정하신 때(마 24:36, 행 1:7)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나타나게 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 재림을 이루실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와 현대의 수많은 철학자들은,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불멸의 ‘영혼’, 즉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든 상관없이 육체적인 죽음 이후 내적이고 비육체적인 생명을 소유한다고 믿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용어들로 유사 기독교 구원 교리를 말하려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는 모든 사람의 내세를 믿고, 죽을 때 혹은 죽은 이후에 있을 심판을 믿는 것입니다. 그 심판 때에, 다가올 삶이 행복할지 비참할지 결정될 것입니다. 이는 로마서 2:1-16을 비롯한 그의 글 여러 단락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불멸의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용어로 말한 적이 전혀 없습니다. 그는 그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죽지 아니함이”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하나님은 궁극적 실재십니다. 그분의 존재는 눈부신 빛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가장 밝은 인간의 조명도 그에 비하며 어두워서 그분의 눈부신 광체를 피해 숨어야 합니다. 인간이 죽지 않는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면, 그분이 그것을 새로운 은혜의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고전 15:52). 바울이 알기로 이 죽지 않는 새로운 생명은 육체를 떠난 영혼으로 살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새로운 몸, 부활한 몸으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명쾌하고 예리하며 기쁨 넘치는 문장들을 써서, 예수님의 복음으로 로마의 권력과 그리스의 지혜에 유대식으로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정의, 경건, 믿음, 사랑, 인내, 온유 같은 덕목들은 우연히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삶에 이런 덕목들이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그것들을 열심히 쫓았고, 노력했고, 다른 길이 아닌 그 길을 따라 살기 위해 몇 번이고 결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자신이 지금 “오는 시대의 생명”(영생)을 살기 시작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들은 만왕의 왕이 자신의 아들을 드러내실 때 그분을 맞이하고 왕으로 나타나신 그분을 축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오는 시대의 생명”의 삶을 살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