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로마서강해]#13. 3:21-24.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언약, 곧 아브라함과 그 가족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은 애초부터 인간의 악과 그 결과를 해결하기 위해 계획되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틀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죄로 야기된 문제(창 3장)를 되돌리시고, 이로써 원래 계획(창 1-2장)을 회복하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부르셨던 것입니다(창 12장). 하나님은 그 후손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 언약을 통해서 모든 것이 바로 잡힐 것입니다. 그러나 언약 백성은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그들은 구원을 필요로 하는 세상과 한통속임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전하는 메신저로 부름 받은 이스라엘은 그 소명을 단순한 특권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구원의 길에 대한 설명입니다.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유대인들은 열심을 다하여 도달하려 했던 것은 하나님을 만족시킬 만한 ‘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서 그 밖의 사람들은 그들의 도덕성과 철학으로써 그것을 행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모든 것이 헛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는 전적으로 새로운 입장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새로운 '의'가 효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하늘나라에 들어갈 허락을 얻을 수 있으려면 먼저 우리는 필연코 '의'로 옷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마태복음 22:1-14에 나오는 왕의 결혼 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고 참여했다고 결국 밖으로 쫓겨났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교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간주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의로 우리를 옷 입히십니다. 즉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의 옷을 우리가 입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 구원하겠다는 것은 즉,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겠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20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할 육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는 더 이상 자기들의 행위로 하나님을 만족케 하리라고는 생각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신을 율법 아래로 도로 가져가는 것이며, 이는 정죄아래에 도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에서 구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새로운 말씀은 율법과 아주 별개로 나타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오직 '율법 안에' 있는 사람들, 즉, 유대인만이 그 계시를 받을 것이고, 그러면 20절을 비춰봐도 그 계시는 별로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전하는 메신저로 부름을 받은 이스라엘은 실패했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이를 지키기 위해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예수님이 메신저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에서의 요점입니다.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믿음은 세 가지 요소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에 대해 아는 것이며 동조하는 것이며 신뢰하는 것입니다. 즉, 신앙은 단순히 진리에 대하여 알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과 구원을 위해 행하신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얻는 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을 바라보지 않으며 자신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그분의 행하신 일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우리들을 바라보았자 우리들에게서 나오는 것은 죄의 본성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바울이 말하고자하는 것은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영광이 궁핍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처럼 그 아들은 더 이상 가진 돈도 없고 멱을 양식도 없고 비로소 "궁핍하기 시작했다". 그 아들이 필요했던 것이 무엇일까? 그만큼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 인간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그 영광에 대해서 모릅니다. 그는 하나님을 싫어하는 자요 하나님을 향하여 등을 돌리고 있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 번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 영광이 열려 나타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기뻐하는 자들입니다. 죄는 우리에게서 '의'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박탈해 가는 것이라는 것을 바울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으니라"구원이란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하나님에 의해 선포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법정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이를 '법정적 칭의'라고 합니다. 칭의는 우리들 안에서 실제적인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인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행함에서 오는 열매가 아니고, '우리들을 위해 행해진' 어떤 것입니다. 우리들을 위해 행해진 사건이 예수님의 속량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번역을 하면 '구속'입니다. 이 말의 뜻은 노예를 되사거나 전당포에서 물건을 되찾는 것을 일컫는 전문 용어입니다.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바울에게는 예수님의 죽음이 실로 새로운 출애굽, 곧 종이 놓임을 받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노예 상태에서의 해방을 말합니다. 이 '구속'은 피고석에 앉은 죄인이 언감생심 바라지도 못할 것, 곧 단순한 사면이 아니라 '의롭다'는 판결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단순히 종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 되는 지위까지 얻었다는 것입니다. 언약 백성이란 마지막 날에 있는 심판보다 훨씬 앞선 현시점에서 이미 '의롭다'는 선고를 받은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으로부터의 값없는 선물입니다. 이 구원은 21절에서 말 한대로 '율법과는 별도'인 것입니다. 값없는 선물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바울이 주장하는 "이제는" 율법의 시대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그리스도의 속량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속량으로 인하여 죄의 권세에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 권세에서 해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이 추구하고 있는 것에서부터의 해방을 말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들 내면에 있는 죄악된 본성에서부터의 해방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인정하고 신뢰하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성경 말씀대로 살아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내면에 있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우리들은 믿음의 열매가 나타난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요점입니다.
이 시간에 한 번 생각해봅시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구원의 열매를 맺고 있는 삶을 살고 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