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로마서강해]#49. 11:7-15. "택하심을 입은 자들"
바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걸림돌’을 사용하셔서,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 곧 아브라함의 가족 안으로 몰려들게 하셨다고 논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말은 온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받아들였다면, 마치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행하신 일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특별한 지위를 재확인하시고 이방인은 영원한 이급 시민으로 남게 하신 것처럼 보일 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들이 동등한 지위를 지닌 구성원이 되기를 원하셨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것이 믿지 않는 유대인이 ‘시기’하는 상태에 있도록 의도된 거라고 바울은 믿은 것입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기뻐하는 모습에서 어째서 유대인이 잔치 자리 밖에서 머물고 있는 것에 대해 아픔을 이야기했었습니다. 바울이 맡은 일은 비유대 세계에서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과 사역을 알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과 사역을 사랑하게끔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사역은 그렇게 함으로써 동료 유대인으로 하여금 ‘시기하게’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 가운데 일부나마 믿음으로 구원으로 나아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11:7-11,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바울은 “그런즉 어떠하뇨”라는 말로 시작을 합니다. 달리 말하면 “내가 말해 왔던 것에 비추어 볼 때 어떤 의견을 말할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은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혼미한 심령을 주셨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 일종의 마비와 무감각을 만드셨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9-10절에서 시편 69:22-23을 인용합니다. 다윗의 탄원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남용하고 오용했던 이런 축복들이 “올무와 덫”, 즉 악에 대한 보답이 되게 하시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탄원의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부분적으로 과거에 성취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요점은 이 탄원의 진정한 성취가 자신의 시대에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이 말은 영적인 무지를 의미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이 말은 힘을 상실해서 꼬부라진 노인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무엇일까?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축복들 자체가 우리에게 저주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굉장히 무서운 말입니다. 오랜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한때 특별한 축복들을 즐거워했던 장소들이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황량한 장소들로 변한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본문에서 말하는 “밥상”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물질적 은사와 축복들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풍요한 축복, 바로 그 축복이 사람들에게 저주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백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축복을 받지 못했고, 하나님에 대해 아무런 지식과 교훈도 갖지 못했던 이방인들보다 훨씬 더 완악해졌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요점은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한 것은 그들이 바르게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구하여도 얻지 못한 이유는 율법과 선지자들을 오해하고, 특히 메시아께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아의 성격, 또한 메시아의 사역에 대해 완전히 오해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었지만 올바른 지식에 따른 열심히 아니었기 때문이다”(10:2). 그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11:11-12,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그들이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하리요”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유대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에 걸려 실족하여 비틀거렸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행위와 자신들이 이해하는 대로 율법을 지켜왔고, 그로 인해 자신들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다는 생각에 계속 집착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걸려 실족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자신의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이 버림받은 것이 최종적인 것인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즉시 “그럴 수 없느니라”는 말로 자기의 질문에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대답은 유대인들의 넘어짐이 이방인에게 구원을 이르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복음에 대한 거절은 복음으로 하여금 이방인을 향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에게 나타난 복음의 결과를 보았을 때, 유대인들의 시기로 인해 그들이 이미 거절했던 복음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이 얻은 축복을 볼 때, 유대인들은 “왜 우리는 이 축복을 얻지 못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이 질문을 계속 심사숙고함으로 결국 그들도 이 축복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 바울의 생각인 것입니다.
바울은 추가하여 이방인들이 당연히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유대인이 배제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포함되었다면 그래서 그 유대인들이 자극이 되어서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면 우리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번에는 우리가 쫓겨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1:13-15,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 이리요” 바울은 주로 이방인들로 이루어진 교회인 로마 교회에 자기가 유대인들에게 그토록 많은 관심을 갖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지를 설명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다름 아닌 이방인의 사도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로마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중 아무도 바울 자신이 유대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두면서 이방인들을 소홀히 여기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이 생각하기에 유대인들이 완전히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멸시하는 위험에 대해 경고하고 이방인들이 이 점에 있어 명확하게 알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한때는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개”로 취급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공동체 밖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을 정확하게 동일하게 대우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있고 유대 민족은 쫓겨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완전히 하나님의 은총 밖에 있다고 여기고 유대인들을 멸시하고 배척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이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위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을 깨닫기를 원했습니다.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교회에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배제하였던 것이 잘못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이빙인들이 유대인들을 배제하는 것도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이방인들은 겸손해야 한다고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많은 유대인들이 구원될 것으로 예상하지 않지만 유대인들 중 일부가 구원을 받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유대인들이 완전히 넘어진 것이 아니라 실족하였음을 증명하려는 바울의 논증입니다. 유대인들은 마땅히 복음을 받아들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실족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의 회복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을 본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유대인 전체가 처음에 복음을 믿었다면, 즉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을 했다면, 복음은 이방인에게 전해지는 데 훨씬 더 오래 걸렸을 것입니다. 복음이 유대인에 의해 거부되었다는 사실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믿게 하는 큰 자극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창세전부터 설계를 하셨다는 것이 바울의 믿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지금 대한민국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창세전부터 하나님이 계획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런 하나님에게 우리는 거저 우리의 생사화복을 위해 존재하는 분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한 번 진지하게 우리들의 신앙을 점검을 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이 시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나는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이런 하나님의 큰 그림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