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마가복음강해]#29. 7:24-30. "수로베니게 여인"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잠시 두로 지방에 머물면서 귀신 들린 이방여인의 딸을 치유하시는 내용입니다. 이 치유 사건은 또 하나의 치유사건이 아니라 정치적 사건에 더 가깝습니다. 마가는 앞 절에서 독자들에게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더러운 영이 들린 여자아이가 있습니다. 앞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1세기 유대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방어막을 흔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잠시 몸을 숨기러 온 이방인의 도시에서 치유와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앞 본문에서 자신이 비밀스럽게 하신 말씀을 행동으로 보이시는 사건인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문을 이해하면 이방 여자와 주고받는 대화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7: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예수님은 서서히 고조되어 가는 유대종교 지도자들의 반대에 직면하여 일단 갈릴리 활동을 중단하시고 그곳을 떠나 북쪽 두로 지역으로 거처를 옮기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선교나 치유 사역을 하시려고 가신 것이 아니라고 마가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의 압박을 피하고 휴식도 취할 겸 그곳을 가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곳에서도 예수님의 소문은 널리 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6:17에서는 산상수훈 당시에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난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7:25-26,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아래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두로 사람은 주로 베니게인이었는데 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 진출한 베니게인과 구별하기 위해 시리아계 베니게인이라 해서 수로베니게인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베니게인들은 우리가 흔히 페니키아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인데 무역에 밝았고 바알을 심하게 섬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베니게인들은 인신 제사도 많이 드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베니게인들이 멸망한 이유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인신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아프리카에 있는 카르타고는 로마에게 멸망하고 두로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게 됩니다. 그 당시 베니게 사람들은 무역업을 종사하여 잘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본문에 나오는 그 여인도 물질적으로는 풍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딸이 귀신이 들렸다는 것은 그 여인의 삶은 귀신 들린 딸과 함께 지옥 같은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 여인 또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갈릴리 지방에 축귀사역을 잘하는 젊은 예언자가 있다는 소문을, 그런데 그 젊은 예언자가 자신들의 지역에 오셨다니 이 여인은 얼마나 기뻤을까, 예수님은 마치 여인에게 한줄기 희망이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기존에 온화하고 친절하고 사랑이 많으신 모습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계십니다.
7:27-28,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본문을 페미니즘의 경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여성이 예수님의 편협한 관점을 질책하고 바로잡았다고 주장을 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가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여자는 오히려 예수님의 명백한 모욕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것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이용한 것입니다. 실제로 유대인은 이방인을 ‘개’로 보는 경우가 많았고, 이방인들도 유대인에 대해 마찬가지로 심한 모욕적인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럼 마가가 본문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내내, 나중에는 초대 교회도 그분의 소명을 다음과 같이 인식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소명은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려 온 구원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예루살렘에서 자신의 소명을 완성하심으로써 그 구원을 실현시키는 것이었다고 인식했던 것입니다(마 10:5-6, 롬 15:8-9). 예수님은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면 그때가 바로 나머지 세상이 창조주이신 이스라엘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심판하시는 통치를 받는 때일 것이라고 믿으셨던 것입니다. 이방인들도 머지않아 구원받겠지만 지금은 예수님이 유대인의 영토를 벗어나 북쪽으로 가신 것은 설교하고 치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위험한 발언과 행동을 하신 후에 잠시 몸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7:29-3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보시고 그 딸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사역은 일차적으로 순회 의료 선교사의 사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도와주는 소명을 받으신 분이 아님을 분명하게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보편적 문제 해결사라는 친숙한 이미지를 입혀 놓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유일무이한 사명의 중대함을 놓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마가는 예수님이 하신 일이, 앞 본문에서 정결과 부정에 대해 하신 말씀이 진실임을 보여 주는 표지라는 관점에서 독자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걸림돌과 금기는 이제 사라져야 하고, 식탁 밑의 개들은 이미 자녀들의 빵을 나누어 먹고 있었습니다. 곧 그들은 더 이상 개가 아니라 같은 자녀가 될 것입니다. 마가는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의 축복에 동참하게 된 이방인들이 모인 자신의 공동체를 분명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입니다. 즉 유대인의 왕이 이 세상의 구원자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여인의 믿음은 무엇일까? 차가운 머리로 생각하는 ‘동의’의 믿음일까? 아니면 뜨거운 심정으로 다가가는 ‘턱 맡김’의 믿음일까?
이 시간 나의 믿음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