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마가복음강해]#39. 10:1-16. "이혼에 대한 가르침"
오늘 본문은 바리새인들과 이혼문제로 논쟁을 하는 내용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갈릴리를 떠나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적대 세력들도 그만큼 예수님을 방해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 또한 무슨 함정을 파놓고 예수님에게 이혼 문제에 대한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4장)와 7장에서 정결에 대해 하신 말씀처럼 제자들과 안전하게 집으로 들어온 후에 자세하게 대답해 주셨을까? 우리는 이 사건이 어디서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요단강 근처 유대 광야입니다. 누가 거기서 일했는가? 세례 요한입니다. 왜 요한은 감옥에 갇히고 끝내는 참수를 당했는가? 남동생의 아내와 결혼한 헤롯 안티파스를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면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10:1-2,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요단강 건너편은 헤롯 안티파스가 통치하는 베레아지역인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요 4:9) 강 동편에 있는 베레아를 우회하여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관례였다고 합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이 헤롯 안티파스가 통치하는 지역에서 이혼 문제를 예수님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의 함정인 것입니다.
아마도 헤롯 안티파스에게는 자신의 아내 헤로디아가 전남편 빌립과 이혼하지 않고 헤롯과 결혼했기 때문에 그것이 그에게는 아킬레스건이었을 것입니다. 그 사실을 지적한 세례 요한을 참수할 정도였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헤롯의 예외적 결혼 과정은 세례 요한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그가 결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시려는 참 왕이 될 수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많은 이유 중 하나였던 것입니다. 헤롯에 대한 비판은 메시아가 곧 오실 것이라는 선언과 함께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이혼에 대해 말씀하실 때 반역죄를 몰만한 말을 할 것인지 찾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마음을 간파하시고 모세가 어떻게 명했는지를 물어봅니다(3절).
10:4-5, “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예수님은 그들의 함정을 알아차리시지만 그렇다고 그 문제를 대충 다루시지 않습니다. 공적 자리에서는 다양한 성경 본문들의 의미를 가지고 논쟁하시고, 사적 자리에서는 제자들에게 날카롭고 직접적인 설명을 덧붙이시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모세를 인용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혼을 명령하거나 부추기지는 않지만, 허용하되 엄격한 제한을 둔 것입니다. 이혼이 성립하려면 정당한 서면 절차를 거쳐야 했는데, 이것은 사회적으로 취약한 여성이 착취당하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장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모세가 너희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이 규칙을 주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 당시의 이스라엘은 창조주의 의도를 충족시킬 수 없었기에 차선을 위한 율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완악함의 치료책을 창세기의 말씀으로 제시하십니다(6-9절).
창세기에서의 말씀은 남편과 아내의 연합은 단순한 파트너십이나 업무 계약이 아니라 새로운 독립체, 새로운 인간 존재를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창세기가 말하는 결혼이 곧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결혼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완악함과 하나님의 최선의 의도와 계획을 따를 수 없는 이스라엘의 무력함은, 그들이 회복된 인간성의 원형이 되기를 바랐던 하나님의 바람을 좌절시켰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상적 기준이나 율법 자체가 아니라, 사람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결국 다른 민족들과 똑같이 완악했고,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들을 숭배하다가 멸망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후손들도 그 전철을 밝고 있는 것입니다.
10:10-12,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물으니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며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오늘날 서구 문화에서는 본문을 너무 “잔인하다, 차갑다. 무정하다. 배타적이다”등의 말들을 한다고 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결혼 생활의 파탄으로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비기독교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적인 자리에서 하신 말씀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예수님의 말씀은 헤로디아의 경우를 언급하신 것입니다. 유대인의 율법에는 보통 여자가 남편과 이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장에 나오는 바울의 주장에서는 특정한 상황의 경우 이혼을 허용하지만, 지금 이 본문의 목적은 구체적 판례를 제시하거나 규칙의 예외 경우를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규칙 자체를 최대한 명확하게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린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를 책망하자 예수님은 도리어 제자들을 책망하시며 천국은 어린아이 같은 자의 것이라며 어린아이들에게 안수하시고 축복하십니다(13-16절). 어린아이는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오로지 어른들에게 의지해야만 합니다. 즉 부모들에게 모든 것을 전적으로 맡기고 부모들을 신뢰하고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고 따르고 신뢰하는 자만이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어린아이들이 부모의 이혼으로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이혼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