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마가복음강해]#56. 14:26-52. "예수께서 체포되시다"
지금까지는 예수님이 모든 것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계획하고 지시하고 가르치고 인도하셨습니다. 언제나 말과 행동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은 무력하신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들이 완전히 쓰러질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공포와 졸던 제자들이 느낀 당황스러움에서 인간적 감정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죽을 때 침착했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 내내 동요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의 제자들은 비록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슬퍼했지만, 마지막까지 그가 일관되게 가르친 것, 그가 냉정하게 내뱉은 마지막 연설을 기억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서 본 예수님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식 영웅담도 아니고 전형적인 유대교 순교자 이야기도 아닙니다.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야만 그 인간적 깊이와 그에 따른 신학적 깊이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또한 샌드치위 방식의 말씀입니다. 가운데 장면은 공포에 사로잡힌 예수님이 다른 길을 제시해 달라고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앞 쪽에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나누는 대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제자가 자기를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다른 쪽은 예수님이 체포되시는 장면입니다.
14:27-28,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예수님은 스가랴 13:7을 인용하여 그 예언이 성취가 된다고 이야기를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임박한 그 어둠의 순간인 ‘고난의 때’를 홀로 당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거기에는 제자들이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님이 잡히신 후 자신들도 예수님과 함께 처형될까 봐 모두 도망쳐 흩어져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이라고 예언자들이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에는 생각이 없고 오직 자신들의 안위가 걱정이 된 모양이었습니다. 이에 성격 급한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절대 자신은 절대로 그렇지 않겠다고 대답합니다(29절).
14:30-31,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베드로의 부인은 그가 제자의 대표격인 위치에 있음을 감안할 때 베드로 한 사람의 차원을 넘어 제자들 전체의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그 자신감은 다음날 새벽까지 남아 있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들은 성경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베드로도 그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 완전히 변한다는 것 또한 우리들은 성경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길인 것입니다. 신앙은 생물입니다. 즉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성장을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에 걸친 베드로의 부인은 예수님이 동산에서 드리신 세 차례 기도의 끔찍한 페러디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바의 손과 뜻에 세 번 자신을 의탁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오른팔 베드로는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은 남겨 두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올라가십니다(32-33).
14:34-36,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예수님의 기도는 앞서서 하나님은 모든 일이 가능하시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신(10:27) 진리에 기초해서 드린 기도였습니다.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시편을 인용해서 자신의 고뇌를 표현하십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그렇게도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도 괴로워하느냐”(시 42:5, 43:5). 예수님은 이렇게나 간절히 기도를 하시는데 제자들은 자고 있는 것을 보고 나무라십니다(37-38).
14:41-42,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예수님은 세 차례나 반복해서 구해 달라고 기도하며 매우 힘겨운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아빠 아버지”에게서 ‘그럴 수 없다’는 응답을 들으신 것 같습니다.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은 다시 중심을 잡고 차분하게 일어나시면서 “이제는 마음껏 자라”라는 역설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모은 작은 양 떼를 지금까지 치셨는데, 이제 목자가 쓰러지면 비록 일시적이기는 해도 양 떼는 각자 흩어져 숨을 것입니다. 그들의 비겁함과 혼란에서 비롯된 행동이기는 하지만, 이것마저도 계획의 일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가롯 유다가 대 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이 보낸 무장 세력들을 이끌고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우선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열두 명쯤 되니까 일단 제자들을 제압하려면 적어도 제자들 보다는 많이 왔을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그들의 목표는 제자들을 전부 잡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잡는 것을 주목적으로 삼았습니다. 또한 밤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혼동될 수 있으니까 가롯 유다가 예수님에게 입을 맞추는 것을 표시로 삼았습니다(43~45).
14:47-48, “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치고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뭉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제자 중 한 사람이 흥분해서 칼을 휘들렀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그를 베드로라고 밝혔지만, 다른 복음서에서는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마가는 그런 태도가 얼마나 부적절한지를 인식하고는 그를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지 않고 “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하나”라고만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장하고 왔다는 사실은 예수님이 일종의 혁명 지도자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이 그런 지도자가 아니라고 거듭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유다 또한 그런 메시아를 원했을지도 모릅니다. 51~52절에 나오는 청년을 마가라고 주장하는 신학자들이 많은데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럴듯한 추론일 것입니다. 마가는 굳이 왜 이런 본문을 남겼을까? 아마도 제자들의 불명예를 지적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처럼 우리는 어느 쪽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는 호언장담하다가도 곧바로 잠들었다가 이어 혼란과 수치에 빠지는가? 우리 계획이나 기대에 어긋나면 예수님을 언제나 배신할 것인가? 아니면 동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깨어서 고뇌에 찬 그분의 기도에 동참할 수 있는가? 이 시간 나는 과연 어디에 속하는가를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