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마가복음강해]#59. 15:16-32. "십자가 처형"
예수님의 죽음이 마가에게 갖는 의미는 그분이 기름 부음 받은 이스라엘의 대변자로 이스라엘의 운명을 짊어지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바로 유대인의 왕이기 때문에 십자가에 머물러 계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분이 왕으로서 받으신 임무이며 통치 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하러 오셨고, 이것이 바로 그분의 하나님 나라의 소명의 절정이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나오는 조롱과 놀림, 수치와 굴욕은 고통과 고문이라는 어두운 그림자와 함께 이 모든 것의 핵심 의미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마가의 공동체와 이 사건을 묵상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믿음과 희망을 주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16~20절까지는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희롱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가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아마도 예수님이 죄가 있고 없다는 것에 아무 상관이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이들은 아마도 예루살렘에 주둔하면서 반란군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반란군들에게 자신의 동료를 잃을 수도 있었을 것이며, 그 반란군 때문에 크고 작은 전쟁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자주색 옷을 입힌 것은 단순한 조롱일 수 있지만 고대 사회에서 왕과 귀족은 자주색 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가시관을 씌우고 침을 뱉고, 지팡이로 때린 일은 매우 폭력적이고 모욕을 주는 행위였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굴욕과 수모를 당하신 것입니다.
15:21-22,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번역하면 해골의 곳) 하는 곳에 이르러”그는 아마도 유월절을 맞이하여 순례를 왔을 것입니다. 마가는 그를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로 소개했습니다. 바울이 로마 교회에 있는 루포라는 사람에게 안부를 전하는 것으로 보아(롬 16:13) 그가 그곳에 살았고 교회의 일원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죄수들은 자신이 달릴 십자가의 들보를 지고 가야 했다고 합니다. 세로 장대는 현장에 미리 세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날 밤에 심문과 고문으로 인해 잠도 못 주무시고 채찍질도 당하셔서 들보를 지고 갈 힘이 없으셨을 것입니다. 군인들은 법적 권한을 사용해서 시몬에게 십자가를 지게 했던 것입니다.
골고다는 당시에 성 서쪽 벽 바로 바깥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이후로 성의 경계가 확장되었고, 예수님의 처형 장소로 추정되는 곳에 세워진 성묘 교회는 현재 성벽 안쪽에 있다고 합니다. 마가는 굳이 아람어 지명을 번역한 것을 보면 그곳이 처형 장소여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으로 이해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은 독자들로 하여금 공포감을 더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약을 탄 포도주로 고통을 완화시키려 하시지 않았습니다(23절). 대신에 아버지가 주신 ‘잔’을 바닥의 앙금까지 다 마시기로 택하신 것입니다(10:38, 14:36). 병사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자 그분의 굴욕과 수치는 극에 달합니다. 십자가에 처형되는 사람들은 나체로 달렸다고 합니다. 병사들이 예수님의 옷을 놓고 제비를 뽑는 장면은 시편 22:19를 연상시킵니다. 이 시편의 말씀은 예수님도 돌아가시면서 시편 22편 도입부를 인용하셨습니다(15:34). 의인이 고난 받다가 회복되는 내용의 이 시편이 그 외에도 예수님이 당하신 일과 여러 면에서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한 초대교회는 자신들이 기억하는 이 사건을 들려줄 때 거기서 해석을 더해 그 의미를 더 온전하게 드러내려 했을 것입니다.
15:26-27,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십자가형에서는 관례상 가로된 들보에 죄인의 죄목을 적을 팻말을 붙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죄목’은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한 것이었습니다. 1차 유대전쟁에서 로마가 승리하고 그들은 그 당시 메시아로 자처하던 시몬 바르 지오라를 로마로 데려와 승리의 행진 끝에 일종의 의식으로 그를 ‘유대인의 왕’으로 처형해서 자신들의 승리를 완성하는 상징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더 강조하기라도 하듯 강도 사이에 처형당하셨습니다. 그들은 좀도둑이나 사기꾼이 아니라 혁명가였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폭력적인 민족, 이 민족주의 게릴라들이 당해야 마땅한 죽음을 당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왕으로 보좌에 오르실 때 그분의 좌우에 앉도록 ‘정해진’ 사람이 누구인지를(10:40) 드디어 보게 됩니다.
십자가형은 조롱으로 시작해서 조롱으로 끝납니다. 이번에는 지도자들을 포함해서 지나가는 유대인들이 조롱합니다(29~32절). 사람들은 예수님이 명확하게 혹은 암묵적으로 하신 주장과 성전에 대한 경고를 되받아치며 조롱합니다. 성전을 무너뜨렸다가 사흘 만에 다시 짓기는커녕 자기 자신도 구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날카로운 비난은 메시아는 로마인의 손에 죽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물리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누구나 알고 있는데, 그가 정말로 왕이라면 십자가에 내려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메시아로 믿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5: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누가복음에서는 두 강도 중 한 명은 예수님에게 신앙고백을 합니다(눅 23:42-43). 즉 그는 이때까지 자신의 신념인 무력투쟁이 틀렸다고 인정을 한 것입니다. 이 혁명가 또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사람은 무력투쟁을 하면서도 많은 갈등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것도 십자가 위에서, 그는 십자가 위에서 ‘회개’를 한 것입니다. 자신이 그렇게나 소중하게 생각했던 가치관을 바꾼 것이었습니다. 즉 자신의 신념을 내려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한 명은 끝까지 예수님에게 저주를 퍼부었다고 누가는 말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주가 다윗의 자손이 될 때 일어나는 일이라고 마가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주신 그 아들의 소명이 온전하게 시행될 모습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드디어 임하는 방식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한 번 심각하게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