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마가복음강해]#6. 2:1-12. "중풍병자를 고치시다"
오늘 본문 말씀은 중풍환자의 치유 사건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 치유 사건이 중요한 점은 예수님이 이적으로 어느 한 사람의 육체적 질병을 치유하셨다는 사실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모든 예언자가 증언하던 바로 그 메시아로서 모든 사람의 영혼의 죄를 사할 권세가 있음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즉 중풍환자의 치유 사건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로서 사죄권이 있느냐 없느냐는 신학적 문제가 제기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당시의 사람들은 메시아를 기대하기는 하였으나 그가 예수님의 주장처럼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적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본문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가야바 앞에서 재판을 받으시는 14장을 가리키는 표지판 역할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본문의 이야기는 마가복음 전체의 축소판인 것입니다. 가르치고 치유하시는 예수님, 신성모독으로 정죄받으시는 예수님, 그리고 결국에는 무죄를 입증받으시는 예수님, 이 중풍환자의 치유는 예수님이 부활할 때 소유하실 새로운 생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분은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에게 그 새 생명을 나누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2:1-2,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예수님은 나사렛에서 가버나움으로 이사를 하신 상태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의 무대는 예수님의 자택에서 벌어진 사건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웃 마을로 짧은 설교 여행을 다녀오시고 나니 마치 오늘날 유명한 연예인이 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집 앞에 진을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 집 앞에 모여들었던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서가 아닐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 싶어서 모인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며, 실제로 몸이 아파 예수님에게 치유를 받고 싶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한 중풍환자를 메고 와서 무리들 때문에 예수님의 집 지붕을 뚫고 구멍을 내어 중풍환자를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3-4절). 이에 예수님은 그 중풍환자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십니다.
2: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환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예수님이 하신 용서는 무엇일까? 설마 자신의 집 지붕을 뚫었다는 것에 대한 용서일까?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투에서 다른 차원의 용서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 용서는 단순한 기물 파손 분쟁보다 더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변 사람들이 불편하게 느낀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오직 제사장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용서를 선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중풍환자에게 그런 용서가 필요했다면 친구들은 그를 떠돌이 설교자가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으로 데려가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에게 왔을까?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에 대하여 이야기하셨습니다. 그 믿음이 이들로 하여금 예수님에게 오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중풍환자에게 말한 믿음은 무엇일까? 그들은 예수님이 구세주로의 믿음보다는 예수님 안에 있는 신적인 능력을 믿는 믿음이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은 병은 죄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은 병 고침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병 고침 사역은 메시아의 시대가 임하였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눅 11:20).
2:6-7,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 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예수님이 갑자기 공중에서 달려 내려온 사람에게 죄를 사한다고 하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특히 성경을 잘 아는 서기관들은 굉장히 분노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죄 사함을 받는 방법은 오직 성전에서 소나 양으로 제사드리는 방법밖에 없고, 그때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사도 드리지 않은 사람 에게 자신이 하나님이신 것처럼 바로 그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죄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서기관들은 “신성모독이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지켜오던 구약의 모든 제사 제도를 뒤집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8-9절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읽으시고는 담담히 묻습니다.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고 서기관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두 가지 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물론 중풍 환자에게 “네 병이 나았으니까 일어나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병이 낫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더욱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은 죽어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죄를 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죄인인 인간이 마음대로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한다고 했다가는 돌에 맞아 죽을 것입니다(레 24:16).
2:10-12,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로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10절이 오늘 핵심 말씀입니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할 권위가 있다”고 말한 예수님의 어법에서는 ‘인자’라는 말은 단순히 ‘나’ 또는 ‘나 같은 사람’이라는 뜻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전체의 관점에서 '인자‘를 보면, 다니엘 7장에서 더 깊은 의미의 단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다니엘 7장에서 “인자와 같은 이”는 하나님의 참 백성을 대표합니다. 그는 악의 세력으로부터 반대를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인정하고 구출하시며, 그가 옳음을 입증하시고, 그에게 권위를 주십니다. 다니엘서에서 그 권위는 하나님의 심판을 시행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인자가 하나님의 용서를 시행할 권위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가야바 앞에서 하실 답변(14:62)을 미리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이런 용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으로 이 세상에서 담대히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과연 담대히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