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

[읽기 쉬운 마태복음강해]#115. 26:69-75. "베드로의 부인"

이헌교 2023. 1. 16. 13:00

 

베드로의 부인은 네 복음서에 다 나오는 내용입니다. 유독 공간복음서에는 제자들 중에 베드로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물론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한다는 상징성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공관복음서는 마가복음을 기초로 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마가가 베드로의 제자인 관계로 베드로의 이야기가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과는 상관이 없는 요한복음에서도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는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만큼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먼저 베드로의 심정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14:28-31에서 호기롭게 예수님을 따라 물 위를 걸으려다 실패하고 구출당할 수밖에 없었던 굴욕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베드로는 얼마나 창피했을까? 또한 베드로는 예수님이 사탄이라고 꾸짖으셨을 때(16:23), 분명 상처도 받고 창피했을 것입니다. 또한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처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도 위대한 일을 행하시고 그것을 제대로 이용하지도 않고 결연하게 함정을 향해 가시는 것을 보면서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겟세마네에서 자신은 최선의 행동을 한다고 한 것이 예수님에게 도리어 꾸중을 듣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또 한 번 예수님을 실망시켰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한 그는 식사 때 마신 포도주 기운이 아직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 또한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을 했는데 자신은 왜 예수님을 따라왔는지도 자신도 잘 모르는 상태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태의 베드로의 심정을 우리가 공감하면서 본문을 읽으면 좋을 것입니다.

 26:69,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이었도다 하거늘”아마도 베드로는 요한의 도움으로 가야바의 집 뜰까지는 들어갔지만 성전 경비대가 지키고 있는 궁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집 뜰 바깥쪽에서 산헤드린 판결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종이 베드로에게 “갈릴리 사람”이라고 부른 것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멸시하는 명칭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요 1:46). 어쩌면 이 여종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에 베드로는 자신도 모르게 그 여종의 말을 부인합니다.

 26: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마태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10:33)는 말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지금 베드로는 그 말씀에 적용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이후 베드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두 번 부인하게 된다(71-74절)고 마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26: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 하니라”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의 눈물은 다음 장에 나오는 유다와 중요한 차이를 보여 줍니다. 즉 진정한 회개와 단순한 후회는 아주 다르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 점을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다시 말하면 베드로의 눈물은 비록 수치스럽고 굴욕스럽고 참담했지만, 그것은 생명의 표지였고, 유다의 분노와 비통은 곧장 죽음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같은 눈물이지만 하나는 생명으로 하나는 죽음으로 이끌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야기가 이처럼 적나라할 정도로 자세하게 네 권의 복음서에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각각의 저자들은 첫 독자들에게 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 물론 예수님이 가야바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참 예언자였음을 보여 주고 있을 것입니다. 또한 초대 교회 지도자들의 겸손에 대해 상당히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에는 시작은 뜨거웠지만 도중에 열기가 식은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또한 반면에 위대한 지도자건 하찮은 여종이건 예수님을 부인하기보다도 심문과 박해와 고문과 죽음에 용감하게 맞선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아마도 이들은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본문에 어떤 힘을 얻었을까?

 예수님을 부인한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문화가 다르고 상황이 달라도, 그날 밤 베드로가 섰던 자리와 오늘 우리가 설 수 있는 자리 사이에는 비슷한 면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삶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도 모르게 예수님이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동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오늘 본문은 어떻게 다가오는 것일까? 이 시간 나는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것을 어떻게 나의 삶에서 적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