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

[읽기 쉬운 마태복음강해]#124. 28:16-20. "가서 제자를 삼아라"

이헌교 2023. 2. 2. 11:03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의 결말입니다. 특히 마지막 구절들을 읽을 때는 천천히 한 줄씩, 한 구절 씩, 음미하면서 어떻게 복음서 전체 내용을 예수님과 제자들의 마지막 만남에 다 응축시켜 놓았는지를 살펴보는 게 좋을 것입니다.

 28:16,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예수님과 제자들의 마지막 만남은 산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많은 일들이 산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산상수훈, 변화산 사건, 올리브산에서의 마지막 말씀, 모세와 엘리야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산에서 만났고,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과 산에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산으로 와서 자신을 만나 위임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28: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본문에서 마태는 제자들 중에 의심하는 자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제자들이 만난 분이 정말로 예수님인지를 의심하는 것일까? 아니면 제자들은 야훼를 한 분이신 참 하나님으로 믿는 착실한 유대인 유일신 론 자 들로 예수님을 실제로 경배해도 되는지 의심한 것일까? 분명한 것은 다수는 예수님을 경배했고 마태는 이것이 올바른 반응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앞에서 몇 차례 마태는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정중하게 나아오는 모습을 설명할 때 이 단어, 즉 ‘경배’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사람들이 반드시 예수님을 신으로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냥 존경의 표시로 그 앞에 엎드렸다는 뜻으로 쓰인 것 같았습니다(8:2, 9:18, 15:25, 20:20, 28:9). 그러나 지금은 마태가 첫 장에서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우리가 알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이시다. 즉,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1:23)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늘 너희와 함께”있다고 직접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적합한 유일한 반응은 ‘경배’인 것입니다. 마태는 지금 아직도 예수님을 하나님일까를 의심하는 성도들을 향해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8: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예수님은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마귀가 예수님께 모든 권세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마귀는 지금 예수님이 치르신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4:8-10). 그렇게 얻은 권세는 껍데기뿐인 승리이며 최악의 독재를 낳을 것입니다. 반면에 부활하신 분으로서 예수님이 가지시는 권세는 독재 자체를, 죽음이라는 궁극적 독재를 패배시키신 분의 권세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그 아래서 하나님의 새 생명이 번성하기 시작할 권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온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것은 신약의 신앙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의 가장 중요한 결과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메시아가 된다는 의미가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 되심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새로운 생명을 얻으심으로써 명백해졌던 것입니다.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맡기신 임무는 첫째로 ‘제자 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에서 어부들을 부르셔서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따라하고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조금씩 이해해 가는 ‘배우는 자’로 훈련시키신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든 사람들을 불러 예수님의 메시지와 예수님의 길을 이해하고 따르도록 훈련시킬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임무는 그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세례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자신의 죽음과 연결시키셨습니다. 세례의 의미 중 하나는 물에 들어감으로써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의 새로운 삶에 동참하기로 결의하는 것입니다. 또한 세례는 누군가에게 거룩한 ‘이름’이 표시되는, 일종의 소인이 찍히는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방법입니다. 마태는 훗날 삼위일체의 교리로 사용될 줄을 모르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했을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은 자신이 특별한 의미에서 즉, 예수님과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알고 있는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사실은 예수님이 자신의 임무를 위해 특별히 ‘성령’으로 준비되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성령은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고,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가 되는 지위를 주셨습니다(3:16, 12:28). 그러므로 우리가 제자로써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성령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 임무는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이 세상의 생활 방식과 사뭇 다른 생활 방식을 낳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이 추구하는 것을 따라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표시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대략적으로 제시된 개인적 도덕성에서부터 18장에서 말하는 차원 높은 용서, 그리고 특히 지도자의 일반적 태도를 뒤집는 것까지(20:25-27), 다양한 차원에서 이미 그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다섯 묶음의 강화를 우리가 기억하고, 그것을 기초로 교회는 새로운 제자들을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이미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임무를 계속 수행하게 하는 약속은 예수님이 항상 그리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빵과 용서, 그리고 악으로부터의 구원은 이 세상이 계속되는 한 언제나 필요할 것입니다. 하늘과 땅이 새 창조에서 서로 만나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지는 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세워진 하나님 나라가 드디어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으로 모든 적을 정복하는 때가, 올 때까지 우리들은 그 날이 오기를 간청하고, 더 빨리 그때가 오도록 기도하며 노력할 것을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