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

[읽기 쉬운 마태복음강해]#22. 5:33-37. "헛 맹세를 하지 말라"

이헌교 2022. 6. 27. 15:35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을 최고의 맹세의 표시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고, 실제로 입다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기 때문에 자기 딸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삿 11:3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것을 반드시 지키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고 이스라엘 백성의 맹세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전혀 무관한 것이었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지만 지키지 못하게 되었을 때 후유증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을 안다면 아예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계명을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서 ‘여호와’라는 이름을 아예 발음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외국인들이 히브리어를 읽으면서 생긴 발음입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라는 단어가 나오면 반드시 ‘아도나이’라고 읽었다고 합니다.

 5: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사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사용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맞게 약속한 것은 이루어 주시며, 또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랍비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면 무조건 지켜야 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아주 무지막지하고 잔인한 분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입다의 서원입니다. 입다는 암몬 족속과 전쟁하러 가면서 만약 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면 가장 먼저 맞이하러 나오는 자를 하나님께 번제물로 바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를 맞이하러 나온 사람은 그의 무남독녀였습니다. 그러나 입다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했기 때문에 서원을 지키기 위해 딸을 죽여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성경의 이러한 내용들로 보아 이스라엘 백성은 일단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뱉은 말이면 그것이 옳든지 틀리든지 상관없이 무조건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약속도 지키지 못하여 결국 앗수루와 바벨론에게 멸망하게 되었다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맹세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5:34상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 찌니”예수님은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책임을 회피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는다면 감히 미래 일에 대하여 자기가 대단한 사람이나 되는 것처럼 거창한 계획을 제시하면서 큰소리를 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미래에 대하여 정확한 하나님의 뜻을 모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여건이나 상황은 쉴 새 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에게 도대체 너희에게 확실한 것이 무엇이 있다고 미래를 걸고 맹세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5:34하-36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사람들이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즉 자기 의지나 이름만 가지고는 상대방이 믿어 주지 않으니까 하나님 앞에서 맹세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땅을 두고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참새 한 마리고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이라고 했습니다(사 66:1). 옛날에는 왕이 발을 얹어 놓는 발판이 있었는데 이 발판이 바로 발등상입니다. 다시 말하면 땅은 하나님 나라의 지점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이 나타나게 해야 합니다. 그런 우리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헛맹세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마태는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서도 기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은 여호와가 계시는 곳으로 성경은 말하고 있었다(시 99:2). 당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요, 정신적인 중심지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에서 먼저 인정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머리는 생명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목숨을 걸고 맹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오래 살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이 살게 하시는 동안만 살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주어진 생명을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우리의 바람직한 자세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내가 주인이 되지 않고 종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겠다고 큰 소리를 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뜻을 살펴보아서 하나님의 뜻이면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만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나는 하나님이 시키는 것 안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은 많은 말이 필요치 않습니다. 종은 주인이 하라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힘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묵상과 기도로 하나님에 대한 지각이 조금씩 자라게 됩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말씀을 통하여 논리적으로 추론하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영성의 훈련입니다. 맹세에 대한 계명이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이 현실에 대한 하나님의 숨은 그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찾고 그 축복을 소유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막힐 때 기뻐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의 삶에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간섭하고 게시며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 마음대로 맹세하고 서원함으로 그 한계를 뚫고 나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사건을 통해 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이처럼 5장의 내용들은 단순한 도덕적 명령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상을,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길을 개척하셨으니 우리도 그 길을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새로운 인간상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