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

[읽기 쉬운 마태복음강해]#28. 6:11-13. "주의 기도 2"

이헌교 2022. 7. 5. 15:05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의 기도는 마술 공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슨 마술처럼 ‘수리수리 마수리’처럼 특별한 의미 없이 입으로 말하기만 하면 되는 주문이 아닙니다. 이 기도에는 우리가 입으로도 말하지만 생각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기도는 인간이 일상 언어로 우주의 창조주와 이야기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 한다는 점을, 그리고 창조주도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원하시고 그것을 의도하셨다는 점을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앞부분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입니다. 즉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두 번째 부분은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모시고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중 첫째는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6: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절대로 여러 날 먹을 양식, 즉 한 달치나 1 년 치의 양식을 달라고 하지 말고, 단 하루치의 양식만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대개 하루치의 양식이 필요한 사람은 그야말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딱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무엇을 말씀하고 싶은 것일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연단의 과정 중에서 그래도 쉬운 것은 물질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자아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 자아를 내려놓는 것이 바로 영적 전쟁인 것입니다. 그 전쟁은 우리가 죽어서 영화의 단계에 들어가기 전에는 날마다 계속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은 가장 먼저 물질을 내려놓는 훈련을 하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고 한 번 따라가 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배성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일용할 양식이었습니다. 만나는 매일 하루치만 하늘에서 내렸고 하루치보다 조금만 더 거두어도 다음날 아침이면 썩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능력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죄를 지으면 성전에 가서 염소나 양으로 제사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창피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염소나 양을 끌고 가는 것 자체가 죄를 지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누군가가 죄를 지으면 제사장만이 아니라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양이나 염소로 제사를 드려야 했기 때문에 금전적인 손실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죄를 지으면 반드시 피로써 죄 씻음을 받아야만 양심이 깨끗해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제 기도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만약에 본문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참 위험한 발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그런데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의 영혼과 인격이 구원을 받았지 우리의 죄된 몸은 그대로 우리 안에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이지만 죄를 지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죄를 짓고 나면 우리 안에 내재하고 계시는 성령님이 불편할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죄를 짓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용어로 ‘죄의 지양성’이라고 합니다. 한 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이 하지 말하는 것을 하고 난 뒤에 눈물로 회개하는 모습을~ 성화의 과정이 이런 과정의 연속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의 과정은 우리의 자아와 성령님과의 영적 전쟁터인 것입니다.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예수님께서 죄에 대한 기도를 가르친 후에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게 하신 것은 여전히 이 세상에는 영적인 전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개 ‘시험’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좋지 못한 유혹이나 충동이라면 ‘악’은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밖에서 공격하거나 고통을 주는 사탄의 공격으로 봅니다. 본문에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우리의 죄된 본성일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과 인격은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는 죄된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내면에는 본성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얼마든지 죄를 지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남을 미워할 수 있고 남의 물건을 탐하여 빼었을 수도 있을 것이며 음란한 충동을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충동이 죄를 짓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본성과 성령님과의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 전쟁에서 이겨야만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주의 기도 끝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과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