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

[읽기 쉬운 마태복음강해]#54. 12:22-32. "예수와 바알세불"

이헌교 2022. 8. 11. 11:34

 

우리들은 위대하고 아름답고 거대한 건축물이나 나이 어린 바이올린 연주자가 협주곡을 당차게 이끌며 연주하는 것을 보면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이것은 평범한 인간의 능력을 크게 넘어서는 어떤 것을 볼 때 나오는 자연스러운 질문입니다. 사람들은 이 질문을 예수님에 대해서 던졌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 하는 사람을 고쳐주자 무리가 놀라 이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22-23절).

 12:24,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예수님의 대항자들은 예수님의 능력이 귀신 두목으로부터 직접 오는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알세불’은 귀신 중의 귀신, 혹은 마귀라 하는 ‘사탄’, 즉 고발자를 일컽는일컫는 장난스러운 별명 같은 것입니다. 문자적 의미는 ‘파리 대왕’ 혹은 ‘오물 대왕’인데, 예수님 당시에는 아마도 마귀를 직접 일컫는 대신 쓰던 일종의 속어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은 왜 예수님이 마귀 대왕과 합세하고 있다고 생각했을까?

 왜냐하면 마귀의 힘을 빌린 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사실상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능력과 영으로 행동하시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하시는 다른 모든 일, 즉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들을 영접하고, 모든 것을 전복시키는 하나님 나라를 선언하고, 민족 해방을 지지하지 않는 등의 모든 일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적어도 바리새인들에게는,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틀린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의 발언은 단순히 심각한 비난이라고만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건 마녀라는 혐의받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예수님이 흑마술을 이용해 장난을 친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다면, 그걸로 예수님은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러한 수법으로 예수님의 계획 전체를, 하나님 나라 운동 전체를 무산시키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본문을 통해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행한 기적과 이적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정말로 그런 일들을 하셨을까? 하는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오히려 그런 의문점을 풀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의 성도들, 즉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도 계속 예수님을 따른 헌신적인 사람들이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마귀와 합세한다는 비난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꾸며 냈을리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그런 비난을 받으셨고, 마태의 설명처럼 예수님이 놀라운 일들을 정말로 행하셨기 때문에 그런 비난을 받으신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말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치유 행위만큼이나 경이롭습니다. 예수님은 곧바로 반박과 역습으로 그 비난을 고스란히 되돌려 주십니다.

 12:25-26,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예수님은 사탄이 스스로 어떤 일을 해 놓고 그것을 다시 되돌린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탄이 누군가에게 공중 부양하는 능력을 주거나, 부와 명성을 얻는 능력을 주었는데, 동시에 그에게 사탄의 일을 방해하는 능력도 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탄이 많은 사람들을 장악하고 싶어 한다면, 많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풀어 주는 능력을 예수님께 주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2:27-28,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요세푸스는 당시 귀신을 쫓아내는 여러 가지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에서도 이런 것을 볼 수 있습니다(행 19:13-16). 즉 유대인 퇴마사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이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았다는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당시 사람들이 깊이 갈망하던, 그러나 이런 식으로 직접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어떤 일의 징조였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2:29-30,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예수님이 ‘힘센 사람’의 집에 있는 물건을 마음대로 집어 가는 중이라면, 그것은 이미 그 사람을 결박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먼저 사탄을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4:1-11). 본문 말씀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자 한다면 먼저 사탄의 유혹에서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즉 날마다 치르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들에게서 예수님의 향기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2:31-32,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본문은 많은 경건한 성도들을 고민에 빠지게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는지 안 지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 말씀은 그 앞에서 일어난 일과 연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일을 보고도 그것이 마귀의 일임이 틀림없다고 단정 짓는 것에 대해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단정하면 단지 용서를 받지 않을 것이 아니라, 받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단정해 버림으로써 용서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를 차단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즉 유일하게 남아 있는 물을 보고 거기에 독이 들어 있다고 단정해 버리면, 갈증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길에 스스로 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들이 그 죄를 짓지 않았을까 걱정한다는 것은 바로 그 죄를 짓지 않았다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나는 진정 예수님이 행한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