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

[읽기 쉬운 마태복음 강해]#37. 8:14-22.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이헌교 2022. 7. 19. 15:33

 

예수님 당시에나 오늘날에나, 경건한 유대인들은 아침에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이 기도는 수천 년 동안 유대인들에게 뼛속 깊이 각인된 것입니다. 공식적인 유대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 기도를 드리는 일이 하루 일과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기도보다도 더 우선시 되는 일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랍비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아들은 장례를 제대로 치러야 하는 의무가 있는데 그 의무는 너무도 막중해서 다른 어떤 일보다도, 심지어 아침에 기도드리는 일보다도 더 중요한 일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예수님은 아주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죽은 사람들의 장례는 죽은 사람들이 치르게 두고, 너는 지금 당장 나를 따라야 한다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만큼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당시 사회의 통념을 넘어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예수님이 오신다면 한국 교회에게는 무슨 말씀을 하실까?

 예수님은 베드로의 장모와 귀신들린 자들과 병든 자들을 고치십니다(14-16). 마태는 예수님의 치유 사역에 대해 온 세상의 질병과 고통을 직접 지심으로써 치료자가 되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가지신 권위는 치료자가 되기 위한 권위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하기 위하여 마태는 이사야 53:4를 인용합니다. 8: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태복음을 읽는 첫 독자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마태가 지금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태는 지금 예수님의 치유 사건과 그분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죄와 죽음을 치유하신 사건을 자연스럽게 연결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선지자들이 말한 메시아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열정적인 제자 하나가 예수님이 어디를 가시든지 따라가겠다고 할 때 엄숙하게 경고하십니다.

 8:19-20,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서기관들은 바벨론 포로이후에 유대사회에서 율법을 보존하기 위해서 등장한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당시 집권층에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서기관들 중에서도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보고 메시아로 인정을 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서기관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구약의 성경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그 또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엄숙하게 경고하십니다. 왜 예수님은 경고하시는 것일까? 서기관 또한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처럼 그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다윗 같은 강력하고 힘이 있는 메시아로 생각을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예언서나 시편에서는 그렇게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치유 사역과 귀신을 물리치는 것처럼 위대하고 승리하는 행진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이 있는 곳으로 가시어, 거기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과 함께하는 예수님에게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여우와 새도 피곤하면 돌아갈 곳이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런 곳도 없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고 거기에 기대실 때까지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으시다고 마태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접하는 그 당시 독자들의 심정을 어떠했을까? 예수님의 이런 심정에 순교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본문에서 말하는 ‘인자’라는 말은 그 자체로는 의미가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그저 ‘나는’ 혹은 ‘나와 같은 사람은’이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구절을 통해서 보면 9:6, 26:64에서는 권위의 뜻을 지니고 있고 20:28에서는 고난에 대한 말씀에서 쓰였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치유를 통한 권위, 고난을 통한 치유, 즉, 고난과 치유가 마태가 그리고자 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인자’라는 단어 하나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8:21-22,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우리는 본문에서 말하는 제자의 아버지가 실제로 돌아가셨는지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그냥 노쇠해지고 있거나 어쩌면 병세가 악화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 사람은 미래에 행할 의무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어느 정도 미루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지금 선택을 유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그 당시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더 중요하고 급박한 것이 나를 따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는 지금 우선순위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본문 속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했을까? 그리고 마태복음의 첫 독자들은 마태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을 알았을까? 그러면 지금 우리들은 마태복음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인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삶을 살아 내고 어떻게 그분을 따라야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분을 따르고 싶어 할까를~

 이 시간 나의 우선순위가 하나님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를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