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사도행전강해]#51. 15:22-35. "교회들에 보내는 편지"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교회에게 편지를 보내는 내용입니다. 어떤 사람이 편지를 보냈을 때, 정말 그 사람이 보냈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바울은 일찍부터 이 문제에 부딪혔습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바울은 어떤 사람이 바울이 쓴 것처럼 편지를 보내어 ‘주의 날’이 왔다고 말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것을 믿지 말하고 바울은 말합니다. 내 글씨를 보고 필체가 다른 편지는 믿지 마라고 데살로니가후서 2:2와 3:17에서 말합니다. 이처럼 편지가 어디에서 온 것인가 하는 문제는, 특히 공식 문서나 칙령의 경우, 고대 사회에서 흔히 야기되는 문제였습니다.
많은 경우 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었습니다. 신뢰할 수 있는 중개인이 편지를 들고 가서 발신자의 지시 사항을 전하고 내용의 진정성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뵈뵈는 바울의 가장 위대한 편지를 가지고 로마로 갔고, 골로새 출신인 두기고는 골로새서를 가지고 그리로 갔습니다.
15:22-23,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로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가 보낸 이 공식 편지는, 제대로 전달되고 제대로 읽히고 이해되어야 하는 중요한 문서였습니다. 특히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보낸 메시지는 너무도 중요하고 바울이 주장하던 기본 입장과 정확하게 일치해서 그것을 오해하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써서 공식 문서 인양 전하는 것이 아님을 안디옥에 있는 교회가 분명하게 알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와 그 외 사람들은 양쪽 모두가 신뢰할 만한 두 사람을 자신들 가운데서 택했습니다. 이 편지는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에서 상당한 호감을 얻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한 안디옥과 그 주변 지역에 있는 이방인 신자들은 할례를 받지는 않았지만 야고보를 비롯한 사람들과 같은 가족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미 이 말이 논점을 상당 부분 인정하는 것입니다.
15:24,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간 사람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일원이라는 의미에서 “우리 가운데서” 간 사람일 수 있으나, 우리는 그들을 보내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전한 말들에 너무 신경을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이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12-13에 보면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같이 먹다가 “야고보가 보낸”사람들이 오자 소심하게도 갑자기 그만둡니다. 바울이 애통하게 말하는 것은 “바나바조차” 그랬다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바울과 함께 그토록 이방인 선교현장에서 같이 했던 자였던 바나바조차 그렇게 했다는 것이 바울을 슬프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이 편지는 야고보가 말한 지침들을 전합니다. 15:28-29,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본문에서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한다”는 것이 할례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이방인 신자들은 유대인 신자든지 비신자든지 이들이 불쾌하게 할 이방 문화의 주요 영역들, 특히 이교의 신전과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상관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러분을 온전한 가족 구성원으로 기꺼이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 요구 사항을 따르기 어렵다면 여러분의 구원은 의심스러운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이 요구 사항을 따르지 못하면, 이쪽 편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일이 훨씬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야고보가 보낸 이 편지는 이후에 바울의 선교에서 어떻게 작용을 했을까? 바울은 이 결정을 다른 곳에서 적용을 했으면 매우 도움이 되었을 텐데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8장 우상의 제물에서의 문제점에서 이 결정을 사용했으면 자신에게 매우 도움이 되었을 텐데 바울은 그 결정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왜 그랬을까? 아마도 갈라디아서에서 드러나 듯, 바울이 사역하여 세운 교회의 신자들이 자신을 예루살렘과 그 지도자들이 보낸 하급사절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엄연히 주요 사도였고 사람들이 바울보다 더 권위 있는 윗사람에게 신앙에서의 문제점을 상고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바울이 세운 교회에서 일어나는 논쟁에 대해 바울이 ‘규칙은 이러하니 이런 방식으로 지키라’ 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남자와 여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교회에 규칙을 주면 하루 정도는 그들을 지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생각하도록 가르치면 평생을 지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이교의 신전에 들어가지 말라고 권면하면서도(고전 10장) 이 결정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34절은 없음으로 나옵니다. 가장 먼저 작성되고 가장 상태가 좋은 신약 성경 사본은 여기에 실린대로 34절은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장절은 16세기 인쇄업자가 성경을 인쇄하기 편하게 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34절 내용은 무엇인데 삭제를 했을까? 40절에 보면 바울은 실라를 새로운 동료로 택합니다. 그렇다면 실라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는 말인가, 아니면 안디옥에 남아 있었다는 말인가? 물론 이 두 가지가 모순인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충분히 실라를 다시 부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엔가 최소한 두 명의 서기관은 독자적으로 이 문제를 정리하기로 했고, 그래서 유다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실라는 안디옥에 남아 있었다는 내용을 사본에 덧붙였습니다. 신약에 절이 매겨질 때 이 추가 내용이 사람들이 사용하던 문서에 남아 있었는데 그 구절이 바로 34절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모든 번역본은 그 구절을 생략합니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신대원에서 신약 서기(신석방), 구약 서기(구석방)이란 과목을 가르칩니다.
성경은 일점일획도 틀린 것이 없다는 성경 무오설을 믿고 있던 성도들은 혼란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무오설은 성경이 하나님을 나타내는데 전혀 오류가 없다는 것입니다. 글자 한자 한 자가 무오 하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곤란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5:35,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으로 돌아와 전도하는 일과 신자들을 가르치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모든 것이 해결되었습니다. 모든 일이 잘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속 사역에서는 좋은 일이 있으면 항상 어려운 일이 뒤따른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러면 어떤 어려운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이처럼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긴장의 연속인 것 같습니다. 항상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에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하는 것을 찾아내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안테나는 항상 하나님에게 향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돈, 권력, 명예 이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나의 안테나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