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사도행전강해]#69. 21:1-14. "당황스러운 예언"
오늘 본문 말씀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친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긴 여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특히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가보는 예루살렘에서 와서 바울의 허리띠로 자신을 묶고, 유대 사람들이 그 허리띠 주인에게 그렇게 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11절). 이것은 단순한 시각 자료가 아닙니다. 예언을 주시는 성령 아래 있으면, 하나님의 미래가 그렇게 현재 안으로 들어와 상징적이기는 하지만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현실이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에스겔은 벽돌을 가져다가 “이것은 예루살렘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고는 그 벽돌에 일어나는 일이 그 성에 일어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유배를 갈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보여 주기 위해 발가벗고 맨발로 걸었습니다. 에레미아는 항아리를 깼고, 그것이 곧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보여 주는 것임을 알렸습니다. 바울은 자신도 예언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향한 예언을 들으면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심정은 어떠했을까 하는 마음으로 오늘 본문을 바라보면 좋을 것입니다.
21:1-3,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고스로 가서···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향해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리라”누가는 바울 일행이 항해했던 곳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이들은 먼저 고스로 가서 로도에 이르고 그다음에 바다로 가서 배를 타고 구브로는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직행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코스가 옛날에는 해적들이 많이 출몰해서 도무지 항해를 생각하기 어려운 길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강대한 로마가 해적들을 다 소탕함으로 아주 안전한 곳이 되었는데 그 길을 사도 바울이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즉, 로마가 닦아 놓은 그 길을 통해 바울의 복음 전파가 이방인들을 항해 거침없이 뻗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21: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하더라”두로에는 스데반이 순교한 후 흩어진 성도들이 모이는 곳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전에 바울은 이 지역을 거처 가면서 복음을 전한 일이 있었고(15:3) 그 때 믿은 신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가정집에서 모임을 가졌기 때문에 일일이 수소문하여 찾아야 했을 것입니다. 바울 일행은 일주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머물며 말씀을 나누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은 것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고난을 받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지 그에게 가지 말라고 만류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만류하는 것은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의 고난의 길을 막아서려고 했던 것처럼 단지 인간의 끈끈한 정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21:8-9,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가이샤라는 거대한 항구도시로서 로마의 총독이 거주하는 정치적 수도였습니다. 빌립보에서 이곳까지 오기까지 약 한 달이 소요가 되었습니다. 이곳에는 빌립과 그의 네 딸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빌립은 사마리아, 에디오피아 내시, 팔레스타인 해안 지역을 다니면서 전도했으며(8:40). 그 후 20년 동안 가이샤라에 머물면서 여전히 전도하는 일에 종사했던 것 같습니다. 그 에게 결혼하지 않은 딸이 네 명이 있었는데 이들 또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주님의 일에 헌신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특히 이들에게는 예언의 은사가 있다고 누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이 딸들이 바울에게 무슨 예언의 말을 전했는지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다음 절에 나오는 아가보를 통하여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21:10-11,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아가보는 바울이 수리아 안디옥에 있을 때 큰 기근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11:27). 이 예언은 글라우디오 황제가 통치하던 때(46년)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바울에게 보다 생생하고 인상 깊게 예언적인 경고를 하기 위해 옛 예언자들이나 유대인들 사이에서 널리 행했던 실물 방식을 사용하였습니다. 아가보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당하게 될 것을 예고했지만 가지 말라고 권고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말을 들은 바울 일행들은 바울더러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권하나(12절). 바울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13절) 말합니다.
바울은 분명 아가보의 경고를 무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종종 예언을 의지했고, 자신도 예언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고난 받고, 투옥당하고, 재난의 소용돌이에 빠질 것을 이미 알았던 것입니다. 누가는 이 경고가 성령 안에서 주어진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 사실과 가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바울이 말한 것에 대해 어떻게 설명을 하는 것에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은 앞으로 닥칠 일을 대략 알 수 있도록 충분한 정보를 주시지만, 갈지 말지를 결정짓는 책임은 당사자에게 맡기시는 것 같습니다. 만약에 바울이 제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다면 로마에는 어떻게 갔을까? 그리고 기독교의 복음은 어떻게 세계로 전파가 되었을까? 그러나 바울은 결심을 굳힌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야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령님은 바울에게 “너가 예루살렘으로 가면 이런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갈 거야?”라고 물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미 죽을 각오를 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이런 마음을 심어준 분도 성령님이 아닌가? 이처럼 우리들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크고 작은 시험대에 올라갈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선택을 할 것인가? 이 시간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를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