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강해

[읽기 쉬운 사도행전강해]#82. 25:13-27. "아그립바와 버니게"

이헌교 2022. 10. 5. 11:13

 

오늘 본문은 헤롯 아그립바 2세가 누이 버니게와 함께 가이사랴에 왔고 바울과 대면하는 내용입니다. 25:13,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해롯 가문과 기독교는 악연의 관계가 깊습니다. 헤롯 가문의 창시자인 헤롯 대왕은 아기 예수를 죽이려 했고 그이 아들 안디바는 세례자 요한을 목 베어 죽였으며, 그의 손자인 아그립바 1세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를 칼로 쳐서 죽였습니다. 아그립바 2세는 그의 아버지 아그립바 1세가 벌레가 먹어 비참하게 죽었을 때 17세 소년이었습니다. 그는 약 50년간 통치한 후 100 년경에 후사가 없이 죽어 “헤롯의 마지막 왕”으로 불립니다. 버니게는 아그립바 1세의 맏딸이며 벨릭스 전 총독의 아내 드루실라의 언니였습니다. 둘은 함께 여행했고 함께 살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자주 구설수에 올랐다고 합니다. 버나게는 또 다른 헤롯이자 삼촌인 칼시스의 헤롯과 결혼했는데, 그가 죽자 아그립바와 가정을 꾸렸다고 합니다. 또한 유대전쟁 때 예루살렘을 정복했고 베스파시아누스를 이어 황제가 된 티투스의 정부가 되었다는 소문도 있었던 여자입니다. 하여튼 두 사람의 관계는 지극히 정상적인 관계가 아닌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25:15,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이르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베스도는 아그립바 왕에게 보고할 의무는 없었지만 로마 황제에게 바울을 보낼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바울의 재판에 대해 설명하고 그의 의견을 들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세요 엄중한 경비하에 죄수가 로마에 도착했는데 그에 대한 고발장이 없으면 이상할 것입니다. 그래서 아그립바의 도움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25:15-21절은 베스도가 바울의 재판에 대하여 개인적 견해를 밝히고 있는 내용입니다. 1)자기가 벨릭스에게서 바울의 사건을 넘겨받았다(14절 하), 2)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이 바울에게 판결을 내릴 수 있도록 그를 붙잡아 두라고 요청했다는 것(15절). 3) 모든 사람이 공정한 재판을 받는 것이 로마의 정책임을 설명하고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16절). 4) 그가 그 후에 가이사랴에서 바울의 재판을 맡았다는 것(17절). 5) 유대인들은 로마 정부와 관련된 죄목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것(18절). 6) 문제의 핵심은 종교와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것이었음(19절). 7) 어떻게 조사해야 할지 몰라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 재판받기를 원하느냐고 물어보았다는 것(20절). 8) 황제의 판결을 받겠다고 해서 그대로 가두어 두었다는 것(21절)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5:22,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된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이르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간추린 설명을 들은 아그립바 왕은 바울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유대교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대해서도 풍부한 지식을 가졌을 수 있습니다. 헤롯 가문은 기독교와 오랜 악연을 가지고 있었고 아그립바도 북쪽 관할 지역 안에 예수의 추종자들이 많이 있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바울이란 인물은 그의 호기심을 자극시켰을 것입니다.

 25:23,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세상 권세들의 상징들이 본문에 나오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왕과 로마의 총독 그리고 가이사랴 최고의 권력자들의 위세와 화려함에 비하여 죄인으로 끌려온 바울의 모습은 너무나 초라하고 한심하게 보였을 수 있습니다. 누가는 이런 대칭적인 장면에서 우리들에게 무슨 메시지를 주고 싶은 것일까? 세상이 추구하는 것을 따라가는 사람은 새로운 세상, 새 창조의 세계로,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25:24-25, “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상소한 고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나이다”베스도가 이 사태에 대해 요약한 내용을 보면 외부인에게는 기독교 신앙이 그렇게 보인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범죄로 고발당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종교와 바울이 살아있다고 주장하는 예수라는 어떤 죽은 사람에 대한 논쟁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교도의 관점에서 본 부활입니다. 베스도가 제대로 들은 것만은 분명했습니다. ‘부활’이 그에게 어떻게 비쳤는지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부활은 죽은 사람에 대한 것이었고, 그 죽은 사람이 살아 있다는 바울의 주장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살아 있다’는 말은 당연히 육체적으로 ‘살아 있다’는 말입니다. 베스도가 내린 결론이, 바울은 예수가 죽은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실제 부활의 엄청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아그립바 왕과의 만남에서 누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로마법의 관점에서 바울이 잘못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대법의 관점에서 바울이 무슨 잘못을 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과 예언서가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고 특히 그분의 부활에서 성취되었다고 하는 바울의 주장은 논란의 여지가 많으며 그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를 석방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에서 황제의 법정에까지 가게 됩니다. 누가는 나중에 로마에서 황제가 법정에 도착하는 장면은 묘사하지 않지만 오늘 본문에서 아그립바 왕이 재판장에 나오는 것보다 더 화려하고 웅장하게 등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권세는 물거품이라는 것을 우리는 지나간 역사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로마는 결국 수백 년 뒤에 멸망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전한 이 메시지는 아직도 교회라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고 앞으로로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승자는 누구인가?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은 세상 권세와 하나님 나라와의 싸움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 나라가 승리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세상의 권세를 따라가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 권세를 이기고 있는가를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