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요한계시록강해]#25. 12:1-6. "여자와 용"
오늘 본문은 하늘에 나타난 큰 이적과 여자의 아이를 삼키려는 용에 대한 내용입니다. 계시록은 페이지마다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고 퇴장합니다. 요한의 이런 의도는 이들을 통해 일부 성경 주제나 인물 혹은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의 정체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려는 것으로 보는 신학자들이 많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자는 누구인가에 대해 많은 의견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본문 5절에서 한 가지 단서가 있다고 합니다. 여자가 낳은 아이는 ”쇠지팡이로 모든 나라를 통치할“ 소년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시편 2:9에 대한 분명한 언급일 것입니다. 앞 본문에서 우리가 보았듯이(11:180, 다른 수많은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요한은 이 시편을 명백하게 예수님에게 직접 적용합니다. 그분은 메시아, 하나님이 불러 열방을 호령하게 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사소하지만 핵심적인 단서로 인해 사람들은 이 이야기 속 여자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성급한 결론이라는 것이 많은 신학자들의 주장입니다. 본문의 이런 종류의 상징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고, 요한은 그 여자가 문자적 어머니가 아니라 ’표징‘이라는 것을 독자들에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 여자 배후에 두 인물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신학자들이 말한다고 합니다. 먼저 성경에서 흔히 ’’ 딸 이스라엘‘, 야훼의 신부로 언급되는 이스라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예언자에게 자주 책망받는 믿음 없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신실한 참 이스라엘, 하나님의 길에 머물고 자신의 소명을 따르려고 분투해 온 나라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 신실한 이스라엘, 말하자면 궁극적으로 ’’ 처녀 딸 이스라엘‘이 마리아를 통해 메시아가 태어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제 중앙을 차지하는 이 여자는 출애굽기 19:6의 ”제사장 나라, 거룩한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열방을 위한, 또 실은 온 창조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실행하도록 선택된 하나님 백성의 전체 이야기를 대표한다는 것입니다. 해와 달과 별로 그의 옷과 그의 발판, 그의 ”열두 별의 관“을 만드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반대편에 가담한 세력들이 여자와 그 아이를 공격하기로 결정한 이유 역시 그 때문이란 것입니다. 마침내 거대한 꼬리를 흔들며 악당이 무대에 등장합니다(3절). 이 악당이 이전 장에서 보여준 모든 고통의 배후에 있었음을 독자들이 깨닫기를 요한은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아이는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용은 그 목적이 진행되기 전에 끝장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의 여자 배후에 있는 두 번째 이미지는 하와, 즉 모든 인간 생명의 최초의 어머니라고 생각하는 신학자들이 많다고 합니다. 하와는 자기 ”씨“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창 3:15). 용의 일곱 머리와 열 뿔은 유대교 사상의 대중적 이미지라고 합니다. 이 비밀이 더 명확해질 때, 용은 나중에 훨씬 완전히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용이 상당한 권력을 지녔음을 알고 있습니다. 결국 용 자신은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3절). 구약 성경에서처럼 ’대적‘ 즉 ’사탄‘은 하늘 법정의 일부고, 세상을 향한 창조주의 계획에 맞서 반역한다는 것입니다. 분명 이는 또 하나의 신비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반역의 결과는 의문스럽다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의 백성에게 사방에서 공격이 쏟아진 뒤, 메시아가 탄생할 때 사이비 ’’ 유대인의 왕 헤롯 공격 시도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마 2장). 그러나 출생하는 아이를 삼키려는 용의 시도는 좌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 용은 더 크게 좌절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의 전체 이야기가 엄청나게 압축되어 아이가 하나님과 그분의 보좌로 이끌려 가기 때문입니다(5절). 다시 말해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과 부활 승천을 통해 승리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여자 곧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은 그사이 위험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마리아에 대한 언급일 수 없고, 이 대목에서 혈통적인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언급일 수도 없을 것입니다. 계시록 전체에서처럼,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메시아시고 그분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이 재정의되었기 때문에, 광야로 도망해 한동안, 즉 3년 반, 1260일 동안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는 여자는 교회여야 한다고 요한은 독자들이 알기를 원할 것입니다. 독자들은 ‘여자’의 일부, 지금 용이 뒤쫓고 있지만 돌보심을 받을 가족의 일부인 것입니다(12:13). ‘광야’(6절)로 도망하는 여자의 이미지는 아마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로 들어가 폭군 바로에게서 도주하는 출애굽 이야기에 대한 또 다른 언급일 것입니다. 이제 이 여자는 이런저런 방법으로 계시록 마지막까지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 용 역시 그 중간에 대부분 우리와 함께 할 것이고, 12-20장 전체 내용의 일부는 요한이 글을 쓰는 대상인 교회에게 용이 어떻게 작동하고, 따라서 용의 권력이 어떻게 전복되는지 이해시키는 것입니다. 교회는 현재의 분투와 고난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던 중에 주무시러 가셨다는 표식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현재의 분투와 고난은 위대한 드라마에서 그들은 두렵지만 중추적 역할을 맡았다는 표식인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과연 그 드라마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