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요한계시록강해]#45. 21:22-22:7. "생명책에 기록된 자"
오늘 본문은 새 예루살렘의 영광과 하나님의 최종적인 승리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기독교 신학 전체가 추구하는 방향은 창조 세계의 선함에 근거해 있지만, 창조 세계의 선함은 부분적으로 창조 세계가 자신을 넘어서서 새 창조를 가리킨다는 데 있습니다. 사실 새 창조는 첫 번째 창조 세계가 형편없이 잘못된 이후 세운 사후 대책과 같은 플랜 B가B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죄가 존재한다는 것은, 어린양의 인격 안에서 길고 인생의 긴 여정 동안 온갖 슬픔과 고난과 눈물과 피가 흐르는 길에서 하나님 자신의 눈물과 피를 거쳐, 하나님의 최종 설계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출애굽기의 장엄한 결론과 마찬가지로, 계시록에서도 이 목표는 순전히 자비와 은총의 권능에 의해 달성된다는 것입니다.. 그 자비와 은총을 통해 창조 세계는 폐기되지 않고 성취되며, 버려지거나 대체되지 않고 새로워진다는 것입니다.
21:22-23,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새 도성에는 성전이 없다고 말합니다. 새 예루살렘에는 에던 동산에서처럼 하나님과 성도가 함께 살고 있고 그 전체가 성소이기 때문에 따로 성전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셔서 온 성을 채우시고(11절) 모든 성도들이 제사장이 되는 성소인 것입니다(20:6). 하늘나라 성도들은 이미 죄 사함을 받았으므로 속죄를 위한 제사를 드려야 할 성전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곳에는 빛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자기 영광으로 도성을 비추시고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요 1:4)께서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에 천지 창조 때 만든 해와 달이 비추어주는 빛이 필요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영광스러운 세상도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다른 것의 시작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즉 창조 세계 자체가 항상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해 만들어 내고자 하셨던 세상을 가리키는 커다란 표지판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인 것입니다.
21:24-27,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시록 대부분에서 ’열방‘과 그 왕들은 적대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우상숭배와 경제적 폭력에 동참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목적, 그분의 백성을 억압하고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요한의 환상은 이사야 60장 같은 성경 예언의 오랜 숙원이 성취되어, 열방이 행렬을 이루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들은 활짝 열린 성문을 통과해 자신들의 영광을 갖고 도성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도성 자체는 사람들이 그저 영광스러운 황금 거리가 아닙니다. 열방이 와서 경배하고 경의를 표할 때, 도성은 움직임이 가득한 북적대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포용성은 가증한 일을 행하거나 거짓말을 하는 사람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는 명확한 경고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밖에서 도성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닙니다. 생명수가 도성으로부터 주위 세상으로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22:1-2,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하나님의 관대한 사랑이 만물의 원천임을 밝히기 위해 요한은 이사야 60장을 거쳐 창세기 1장의 궁극적 성취에서 시선을 돌려 에스겔 47장을 거친 창세기 2장의 궁극적 성취로 향합니다. 에스겔 43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새로 지어진 성전으로 돌아온 뒤에, 우리는 이 성전이 실은, 일종의 새 에덴이어서, 거기서 한 강이 흘러나와 주변 세상에 물을 대 주고 있음을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는 네 강이 동산에서 흘러가지만, 에스겔서의 새 에덴에는 하나만 있고, 그 강은 점점 더 깊어지면서 유대의 급경사면을 쏟아져 내려가 사해까지 새롭게 만듭니다. 에스겔은 환상에서, 그 열매는 음식물로 사용되고 잎사귀는 치료제로 사용되는 과실나무가 강 양쪽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47:12). 요한은 생명수 강이 반짝거리며 도성 거리를 관통해 전원 지역 너머로 흘러 나가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에스겔서에서는 이것이 창세기 2장의 재탄생이라는 점이 아주 명확하지 않지만, 요한에게서는 이 점이 훨씬 선명하고 예리하게 부각된다는 것입니다. 강 양쪽에 풍성하게 자라는 나무는 ’생명나무‘입니다. 곧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될 때 그들에게 금지되었던 나무입니다. 그리고 ’생명나무‘는 단지 이 사람이나 저 사람들을 치유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한의 환상은 항상 더 큰 실체, 거대해서 종종 파악하기 힘든 사회, 문화, 정치적 고통과 의혹, 군사적 격돌,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고 있음이 드러난 사이비 ’셰계 지도자‘에게 관심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잎사귀는 열방의 치료를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열방이 와서 경의를 표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치유하기 위해 친히 임재하는 도성을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이 도성은 제사장처럼 나머지 창조 세계의 찬양을 소집할 것이고, 또 왕처럼 치유하는 지혜로운 질서의 원천이 되어 하나님의 통치를 세울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의 환상에서 새 예루살렘은 새 창조 세계의 전부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것은 새 창조 세계 전체의 중심부와 영광, 세상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마음껏 흘려보내는 원천이라는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은 지성소지만 사실은 땅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할 것이고, 궁극적 성전이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하나님의 종들과 어린 양이 경배하고(3절) 그분의 열굴을 볼 뿐만 아니라(4절) ’영원히‘ 통치한다고 서술할 때(5절), 이 말의 의미가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그 도성, 다시 말해 신부, 다시 말해 어린 양의 제자에게서 치유와 회복의 청지기직이 흘러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창조주 하나님은 창조 세계가 선했고, 또 자신이 자비로 충만하다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보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의 환상은 새 에덴의 환상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동산이 아니라 도시란 것입니다. 동산의 모든 요소가 여전히 거기 존재하지만, 도시 안과 주변에서 보존되고 개선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새 창조는 두 가지 비전을 하나로 묶어 둘 다를 변혁하고 치유한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될 때, 신부와 어린 양이 하나가 될 때 이 두 가지는 마침내 통합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동산과 도시도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서로, 또 하나님과 연합하여, 보좌에서 나오는 영광스러운 빛을 받으며, 땅과 그 열매 위에 기쁘고 지혜로운 청지기직을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과연 청지기직을 잘 수행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