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요한계시록 강해]#3. 3:1-6. "사데 교회"
오늘 본문은 사데 교회에 보내는 편지 내용입니다. 사데는 두아디라 동남쪽으로 48km 떨어진 곳에 있는 라디아 왕국의 수도였습니다. 정치적, 군사적으로 중요한 대도시였고 무역이 발달하고 일찍부터 양털 가공업과 염색 공업이 발달하였다고 합니다. 사데는 오랫동안 난공불락의 도시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사데는 가파른 언덕 꼭대기에 자리 잡아 안전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은 절대 함락되지 않을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크로이소스왕 통치 기간에 페르시아 침략군이 침입로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굉장히 용감한 어떤 사람이 깎아지른 벼랑에 올라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고 합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기 때문에 결과는 더한층 참혹했다고 합니다. 여러 성경 이야기에 등장하는 페르시아의 고레스는 주전 546년에 사데를 정복했다고 합니다. 사데는 중요한 도시로 남았지만 쇠퇴하게 되는 무기력한 도시로 남게 되는 뼈아픈 교훈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사데의 기독교 공동체가 그 교훈을 되풀이해서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사업이 활발히 성업 중이라는 것입니다. 사건이 일어나는 공동체라는 명성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명성 탓에 잠들었고 깨어나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다. 좋은 일도 제법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신속하게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그들 역시 사라져 갈 것이라고 말하시는 것입니다.
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사데 교회는 발람의 교훈이나 이세벨의 악행을 비난하는 내용이 없지만 착한 행위에 대한 칭찬도 없습니다. 사데 교회는 다른 교회들보다 더 심한 경고를 받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실제적인 사악함 때문이 아니라 사치에 물든 안일함과 무기력하고 소망 없는 평화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기보다는 그 주위의 환경에 영향을 받았던 것입니다. 즉 겉으로 보기에는 신자 같지만 속으로는 참된 신자가 아니며, 사람이 보기에는 신자 같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신자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또한 외형적으로는 교회 건물과 신자들이 있고 예배와 성례를 행하고 교회 형태를 띠고 있지만 실상은 영적으로 생명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죽은 교회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실제로는 죽어있는 사데 교회의 절망적인 상황에 대해 권면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3:2-3,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주님은 우선 “일깨어”나라는 것입니다. 즉 “깨어나라”고 권면하십니다. 사데 교회는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라 깊이 잠든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난공불락의 요새인 줄 알았고 안일에 빠져 있다가 적에게 점령당했던 사데의 교회에 적합한 경고의 메시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잎이 무성하고 싱싱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뿌리까지 썩어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한 과실나무같이 하나님의 기준에 못 미치고 영적으로 죽은 교회의 전형이라고 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처음 복음을 받아들이고 들었을 때의 기쁨과 감격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고 권면하십니다. 또한 그 복음을 굳게 지키고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으면 “내가 도둑 같이”오신다고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도둑처럼 오신다는 그 날이 언제 일어날지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는 바울과 베드로, 예수님의 가르침에 있는 비슷한 말씀으로(살전 5:2, 벧후 3:10, 마 24:43), 이는 분명 초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정기적으로 울린 경고음이었을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오실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늦기 전에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권면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3:4-6, “그러나 사데의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예수님은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와 “이기는 자”는 예수님이 승리자로 오실 때 개선 행진에 참여할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주제는 나중에 이 책에서 반복해 등장할 것입니다. 그들은 개선 행진에 참여한 사람들처럼, 또 갓 세례 받은 사람들이 물 위로 나올 때처럼 흰옷을 입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죽음을 포함한 인간의 대적들을 이기신 예수님의 승리를 공유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그대로 계속 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 역시 나중에 계시록의 여러 상황에서 언급됩니다(13:8, 17:8, 20:12, 21:27). 이 개념은 출애굽기 32:32에 언급된 하나님의 책에 대한 고대 이스라엘 사상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것은 힘을 복돋는 구절은 아닙니다. 거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땅히 그 책에서 지워져야 했는데, 오직 하나님의 새로운 자비의 행동만이 그들을 이 상황에서 구원했기 때문입니다. 계시록이 쓰여진 비슷한 시기에, 많은 그리스 도시들은 모든 시민의 공식 명부를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한 시민이 사형 선고를 받아야 할 때, 먼저 그의 이름을 명부에서 지워 버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형에 직면한 한 시민의 이름으로 인해 도시의 명성에 어떤 오점도 남기지 않고 선고를 내릴 수 있게 하는 엄격한 관습을 지켰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책에 있는 이름은 지워질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깨어 있는 사람들, 더럽혀지지 않은 사람들, 그리고 이기는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복음서 전승에서 잘 알려진 또 다른 약속을 반복하십니다. 즉 예수님은 아버지와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그 이름을 시인”하실 것이라(막 8:38)고 약속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시인하시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순간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늦기 전에 깨어나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과연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나를 시인할 만큼의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지 한 번 점검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