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요한복음강해]#30. 7:40-52. "메시아는 어디서 오는가"
오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무리들의 반응과 종교지도자들의 반응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예언자’, 즉 신명기 18장에 약속된 모세 같은 예언자신가? 아니면 그분은 메시아신가? 요한복음에서 다윗과 베들레헴이 언급되는 유일한 본문입니다. 아마도 요한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전하는 전승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은 초기 생애의 대부분을 갈릴리에서 보내셨지만, 태어나신 곳은 베들레헴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무리들의 반응은 세 가지로 나뉘었습니다. “참으로 그 예언자이시다(40절). 모세가 예언한 그 예언자(신 18:15)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는 여기지 않은 무리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무리는 ”이 분은 그리스도이시다“(41 상반절), 예수님을 예언자 이상의 메시아로 인정했는데, 그들이 기대하는 메사아는 정치적, 지상적, 현세적 메시아였던 것입니다. 세 번째는 ”그는 성경의 예언에 맞지 않는 사람이다(41 하반절, 42절), 그들은 나름대로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에서 나고(삼하 7:12-13, 렘 23:5), 다윗이 살았던 마을, 즉 베들레헴(삼상 17:15, 미 5:2)에서 태어나실 것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실제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으며(마 2:1) 단지 나사렛은 그가 자라난 곳(마 2:23, 눅 2:39)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7:43-44,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무리들은 예수님으로 인한 극심한 분열 상태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어둠 속에서는 분열이 없지만 빛이 나타나면 빛과 그림자로 나누어지듯이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이 계시면 언제나 그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분명히 나뉘게 된다는 것입니다(마 10:34-35). 이것이 기독교 2천 년 역사가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논쟁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믿고 사랑해야 할 분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악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체포하고자 했지만 아직은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30, 32절).
7:45-46, “아랫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그들이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나이다 하니”32절에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부하들을 보냈는데 이들은 예수님을 잡아오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을 고용한 제사장들은 화가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하들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는데 그 이유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이 그들을 꾸짖습니다.
7:47-49,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바리새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율법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 남자가 어긋난 행동을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율법을 어기신 것은 단 한 번 안식일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율법 전부를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오만하게 ‘율법을 알지 못하는 한심한 무리’라고 일축해 버립니다. 바리새인들의 입장에 볼 때 그런 사람들은 사실상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에 자신의 뜻을 계시하였으나, 사람들이 율법을 이해하고 따르는 수고를 감내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그보다 나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은 분명 말주변 좋은 사기꾼이거나 자칭 예언자들인데 부하들이 이런 자에게 미혹되었다고 바리새인들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7:50-51, “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요한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를 다시 등장시킵니다(3:1-13). 그는 19:39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대답은 율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정작 바리새인들 자신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에 대해 하는 말을 들어 보거나 그분이 하시는 일을 보지도 않은 채 그분을 정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사상에 위험을 느낀 사람들의 전형적인 행동 방식인 것입니다. 즉 어떤 구실을 대서라도 서둘러 싹을 잘라 내는 것입니다. 애석하게도 사람들은 지금도 복음을 이렇게 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니고데모처럼 비난의 오류를 지적할 지혜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우리들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즉 복음전도는 우리들의 삶으로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7:52,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이들은 니고데모가 갈릴리 출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갈릴리에서 왔느냐고 비아냥거리는 것은 자신들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예루살렘의 대다수 일반 유대인들을 깔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북쪽에서 온 사람들까지 깔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의 유명한 두 예언자 요나와 호세아는 둘 다 갈릴리 출신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갈릴리에서 선지자가 나지 못한다”에서 “나지 못한다”는 말은 ‘일어나지(rise up)’않는다는 단어로써 요한은 이 단어를 다른 곳에서는 ‘부활’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습니다. 요나는 말 그대로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 있다가 ‘죽은 사람들로부터’ 돌아온 사람으로 회자되었습니다. 그리고 호세아서에는 하나님이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실 것’이라는 예언이 들어 있습니다(6:2). 요한이 사용한 그 단어는 예수님이 고향인 그곳에서 ‘나오셨을’ 뿐만 아니라, 더 깊은 의미에서 ‘일어나서’, 자신이 정말 예언자요 메시아임을 입증하실 거라는 진리를 넌지시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독자들은 이런 요한의 뜻을 알았을까? 이처럼 성경은 알면 알수록 신비가 가득한 책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을 하면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그대로 행했기 때문에 율법의 정신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사랑’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 율법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계속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율법의 정신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막 12:30-31)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율법의 행위를 중요시하고 있나 아니면 율법의 정신을 중요시하고 있는지를 한 번 점검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