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강해

[읽기 쉬운 요한복음강해]#41. 10:11-18. "목자와 양"

이헌교 2023. 4. 4. 16:43

 

지난 장 곳곳에서 죽음의 위협에 직면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잔혹한 죽음이 한낱 위험한 가능성에 불과하지 않다고 선언하시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목자와 양의 비유의 말씀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십니다.

 10:11-13,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해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선한 목자로 표현되었고(시 23:1, 사 40:11), 그밖에 모세(사 63:11)나 다윗(시 78:70-72)과 같은 이스라엘 지도자들도 그렇게 표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또한 자신이 선한 목자라고 표현하시고 있습니다. 참 목자란 자기 이익을 위해서 그 일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실 그가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 판가름하는 시험대는 선택의 상황에서 나타날 것입니다. 사자나 늑대, 곰 따위의 약탈자가 등장하는 상황에서 그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참 목자와 거짓 목자로 구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짓 목자는 자신의 명예를 희생하더라도 출세를 선택하지만, 참 목자는 양을 위해 죽을 각오를 함으로써 자신이 누구인지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10:14-15,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본문에서 “안다”는 뜻은 단순히 직관적이며 순간적인 지식이 아니라 경험적이고 지속적인 지식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차가운 머리로 따지고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가슴으로 느끼고 체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기독교는 뜨거운 심장의 종교라는 것입니다. 양들이 위험에 처하면 목자는 자신의 이익과 손해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거의 본능적으로 자신의 몸을 던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선한 목자이기 때문에 양이 목전에 위험을 두고 있다면 자신이 가서 그 문제를 해결하고 필요한 경우 양에게 닥칠 수도 있었을 그 운명을 스스로 지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10:16-17,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원래 ‘양’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또 동시대 유대인 가운데 그 부르심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신뢰하여 그분에게 나아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예언서와 지혜서 저자들이 늘 암시했듯이, 하나님의 관심은 결코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다른 양’이란 하늘 아래 모든 민족에서 나온 커다란 무리, 즉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하시려는 무리입니다. 즉 유대인의 메시아가 온 세상의 주님과 목자가 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지금 우리에 있는 양들을 당면한 위험에서 구출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엄청난 많은 수의 온갖 양들을 데려와서 양 떼의 규모를 크게 확장시키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은 더 이상 원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 우리에 들어가지 않은 양이란 것입니다.

 10: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예수님은 그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부활 소망사상을, 자기 사역의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목자와 양을 하나로 묶어 주는 신뢰와 사랑의 끈이 아버지와 아들을 연결시키는 끈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에스겔 34장의 예언을 인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신학자들은 말합니다. 그 장에는 신기한 내용이 있습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참 목자가 되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뒤에 에스겔은 다윗, 다시 말해서 메시아를 참 목자라고 부르면서, 하나님과 똑같이 목자와 양의 하나님이 되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목자신가? 아니면 메시아가 목자신가? 에스겔은 답을 주지 않습니다. 그는 다만 미래를 가리킵니다. 그 답을 우리는 요한복음 10장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30절에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시듯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이 모든 것 덕분에 예수님이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부르시는 이유가 설명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선하다’고 요한이 사용한 단어는 도덕군자처럼 처신하다는 것 보다는 ‘아름답다’란 뜻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이 단어는 예수님의 겉모습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목자로서 그분이 하시는 일의 순전한 매력을 가득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부르실 때, 사람들은 오고 싶어 합니다. 또한 그분이 자기의 소명을 다하기 위해 돌아가셨음을 깨달을 때, 사람들은 그 이상을 하고 싶어 합니다. 이처럼 요한이 예수님을 ‘선한 목자’라고 부르는 목적은 예수님의 신비롭고 강렬한 사랑의 힘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선한 목자인가 삯꾼 목자인가를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