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요한복음강해]#69. 17:9-19. "예수님의 기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기도는 자신이 떠난다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그분은 자기가 돌보았던 것과 똑같이 제자들을 돌보실 거라 믿는 아버지께 제자들을 의탁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위험에 처해 있음을 깊이 인식하시고 계십니다. 자기를 미워했듯이 제자들을 미워하는 세상이 그들을 위협하고 괴롭힐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았지만 세상으로 파송되어야 하기에, 보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기도의 내용입니다.
17:9-10,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 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누구인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즉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다’라는 말은 하나님을 떠나서 이 모든 것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또한 세상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의 지배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근본적 사고방식은 성경, 즉 위에서 내려온 계시에 의해 통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개념인 것입니다. 즉 회개는 우리들이 지은 죄들에 대해 참회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의 개념은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관을 떠나 하나님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서를 해석할 때 회개의 개념을 잘 모르면 올바른 해석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세상’은 단지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적 우주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반역했고, 빛보다 어둠을 선택했고, 스스로 주도하여 창조주에 맞선 세상을 뜻합니다. 그런 '세상‘에서 볼 때 예수님은 다른 곳의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제자들이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악한 반역을 일삼은 ’세상'으로 떠밀리지 않도록 보호받는 것입니다. 그 보호를 아버지에게 맡기고 계시는 것입니다.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예수님은 아버지를 “거룩하신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제자들이 “구별되게”하려고 “자신을···구별하신다고 선언하십니다(19절). 1세기 유대교에서 ‘거룩’은 특히 성전을 연상시킵니다. 성전은 거룩한 곳, 거룩하신 하나님이 살기로 약속하신 곳이었습니다. 이 말은 특별히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속죄하기 위해 1년에 한 번 들어가는 지성소를 가리킵니다. 대제사장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서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려면, 특별한 ‘성별’ 의식을 거쳐 ‘구별되어야’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그동안 오직 하나님만 섬기기 위해 자신이 ‘구별’되었습니다, ‘성별’되었다고 선언하십니다. 이제 대제사장처럼, 그분은 자기 백성을 악에서, ‘세상’의 속임수와 덫에서 보존해 달라고 아버지께 간구하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백성이 더할 나위 없이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바라십니다(15-16절).
17:12,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존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예수님의 간구는 제자들과 함께 계셨을 때처럼 제자들을 앞으로도 계속 보호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기도는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 주옵소서”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인격과 속성에 대한 특별한 계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이런 관점에서, 즉 우리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았던 비밀이 우리에게 밝혀지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세상의 악에서 제자들을 보호해 줄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면 세상의 어두운 곳에서 빛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17: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에 속한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들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을,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는 ‘기쁜 일들을 멸시하고 수고스러운 날들을 살자’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그리스도인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 너머 저 천국의 순전한 축복과 영광과 기쁨만을 학수고대하며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맛볼 수 있는 구원의 유익들이나 축복들을 스스로 완전히 박탈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기독교의 축복은 내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생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구원에는 여러 가지 측면들이 있지만, 내세를 강조하기 위하여 현세를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현세를 강조하기 위하여 내세를 무시하는 것도 지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원래 기독교인들은 구원의 기쁨을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 기쁨의 원천이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을 우리 안에 누리면 사는 것입니다.
참된 기쁨은 조작해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참된 기쁨은 개인 존재의 깊은 곳에서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우리가 만들어 내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속에 심겨진 것입니다. 이런 기쁨이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오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인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써의 특권을 누리고 있는지를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