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강해

[읽기 쉬운 요한복음강해]#70. 17:20-26. "연합되게 하소서"

이헌교 2023. 5. 17. 10:32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문으로 오늘날 교회론의 중요한 근거가 되는 내용입니다.

 17: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예수님은 제자들의 말 때문에 “나를 믿게 될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 곳곳에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메시지는 들은 이들이 다시 그것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또 전하고, 또 전했습니다. 교회는 한 세대가 지나지 못해 사라질 수도 있었습니다. 단 한 세대만이라도 말씀을 전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늘 다른 사람에게 전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또한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사명인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전승인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우리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세대와 다가오는 모든 세대의 믿는 사람들을 생각하시면서 이렇게 기도를 하십니다

 17:21-22,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예수님은 우리가 제자들, 즉 ‘사도들’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우리가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교회가 되도록 기도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우리가 모두 하나 되기를 애타게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역사는 예수님의 바람과 달리 끝없는 분열과 전쟁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1054년에 필리오케 논쟁으로 인하여 동방과 서방의 교회가 분열되고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개신교가 탄생하고, 그 개신교 안에서도 성찬문제로 인해 루터파는 ‘공재설’, 칼뱅파는 ‘임재설’, 쯔빙글리파는 ‘기념설’로 분리가 되고 세례문제로 ‘재세례파’가 분리되었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개신교신자들이 교리문제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시는 사건도 생기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수많은 교단으로 분열되어 있는 현실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천국에서 이런 현실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계실까?

 17: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연합은 한낱 형식적인 관계 설정이 아닙니다. 한낱 외적인 현안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와 아들의 연합입니다. 요한복음 대부분이 설명하며 살펴 온 그 연합에 토대를 두고, 그것을 반영해야 합니다. 즉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계시고 아들이 아버지 안에 계시듯이, 우리도 그 연합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서로 연합해야 한다는 뜻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세상은, 인종과 관습, 성, 계급이라는 온갖 전통적 장벽을 넘어 연합한 인간 공동체가 하나님의 행위로부터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연합은 필수조건인 것입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예수님의 기도가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우리는 자주 경험하고, 느끼고, 깨닫고 있는 현실입니다.

 모든 인간관계와 마찬가지로, 연합은 강요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열의 경계면이 소위 ‘종교적’노선과 일치하기 일쑤인 분열된 세상에서, 모든 세대마다 예수님이 기도하신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새롭게 일하지 않는 데는 어떤 핑계도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우리가 믿음 안에서 하나라면, 우리 삶과 예배에서 하나가 되지 못할 결정적 이유도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은 초반의 주제로 돌아가십니다(12:26, 14:3).

 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예수님은 지금 자신을 따르는 자들은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그분의 영광을 보아야 하고 또한 아버지께서 자신을 세상의 통치자로 높이셨음을 깨닫고 경험해야 하며,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사랑이 자신을 만물을 향한 사랑의 주로 삼으셨음을 알리고자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자기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요한복음의 전체 메시지를 오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높아지시는 이유는 다름 아닌 사랑 때문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보다 자기가 우월하다고 생각하게 하는 통치권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그들을 사랑의 섬김에 헌신하게 하는 통치권인 것입니다.

 17:25-26,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본문은 이 기도 전체의 주제인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감싸시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랑이, 모든 예수님의 사람들을 한데 묶고, 예수님을 그들에게 그리고 그들을 통해 세상에 나타낼 것입니다. 또 11절에서 예수님은 “거룩하신 아버지”라고 부르셨다가 이제는 “의로운 아버지”라고 부르십니다. 즉 아버지는 온 땅의 재판관이시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맹렬히 맞서지만, 최후의 심판 재판관이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심판은 우리 앞에 사랑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의로운 심판이 궁극적으로 우리 앞에 예수님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나는 의로운 심판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