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요한복음강해]#80. 19:38-42. "예수의 장례"
예수님 당시 장례 관습은 오늘날 우리의 관습과는 많이 달랐다고 합니다. 관도 없고, 화장도 하지 않았고, 무덤은 바위를 깎아 낸 빈 동굴이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고고학자들은 그런 무덤을 많이 발견했다고 합니다. 아마 동굴 출입구는 아주 작아서 높이가 1미터가 조금 넘었겠지만, 그 안은 두세 사람이 걸을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양쪽에는 선반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무덤을 만들려면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무덤을 여러 번 사용했다고 합니다. 무덤에 안장하는 첫 시신은 선반 하나에 놓일 것입니다. 첫 번째 시신이 완전히 부패하기 전에 두 번째 시신을 안치할 가능성이 높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엄청난 양의 향유 및 향수와 함께 천 조각으로 시신을 싸두는 한 가지 이유가 이것입니다. 즉 악취를 막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또한 무덤입구에는 무거운 바위로 막아서 도굴꾼들을 막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신이 완전히 썩으면 유골을 거두어 유골함에 넣고 그 유골함은 동굴 뒤편이나 다른 안전한 장소에 보관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장례는 두 단계로 진행이 되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장례 사이에 몇 달, 심지어 1년 이상이 걸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런 그 당시 장례 풍습을 알면 오늘 본문을 해석하기가 좋을 것입니다.
19: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라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예수님의 장례를 주관한 사람은 열두 제자나 충성된 여자가 아닌 요셉이란 인물입니다. 이 사람은 요한복음에 처음 등장합니다. 그는 같은 동족이 두려워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숨기고 있었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그는 “존경받는 공회원 회원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였다고, 마가복음 15:43에서 말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로마법에는 죄인의 친척이 요구하면 시체를 내주게 되어 있었는데,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루살렘에 없었기 때문에 그 시체를 내어달라고 청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의 지위와 명예에 치명적인 손실이 가해질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제자임을 밝히면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빌라도에게 간청을 했고, 빌라도 또한 공회원이 부탁을 하고 자신 또한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요셉의 청을 들어주었을 것입니다.
19:39-40,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니고데모가 가지고 온 향유는 약 40kg 라고 합니다. 베다니에서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었다가 사람들이 낭비라고 불평했던 양의 100배인 것입니다. 이것은 왕에게 사용할 만큼의 양이라고 합니다. 요셉과 니고데모는 지금 빌라도의 명패에 동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분이야 말로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니고데모는 3:1-10에 처음 등장합니다. 그가 밤중에 찾아와서 예수님과 나눈 대화는 요한복음 전체에서 예수님이 사람들과 나눈 아주 긴 대화 중 첫 번째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대답하시면서, 새로운 출생,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광야에서 모세가 뱀을 들었던 사건을 언급하시고. 인자가 마찬가지로 높이 들려서 자기를 믿는 모든 사람이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3:14-16). 그런 다음 예수님은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나오려고 하지 않지만, 의를 행하는 사람들은 빛으로 나와서 자신들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이 분명히 밝혀질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3:19-21).
지금 니고데모가 등장하는 시간은 어두워지기 직전입니다. 이번에 그는 잠깐이긴 하기만 빛 안에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시작되는 해질녘 전에 시신을 묻어야 했습니다. 그는 빛으로 나왔던 것입니다. 그의 제자도는 성장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는 것입니다. 그는 율법 문제에 대해 예수님을 두둔했다가 쓰라린 조롱을 당한 때를 거쳐(7:50-52), 아무 득이 될 건 전혀 없고 자신의 전부를 잃을 수 있는데도, 예수님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섬김을 수행하는 순간입니다.
19:41-42,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다른 설명에 따르면 요셉이 그 무덤의 주인이라고 합니다. 본문의 핵심은 그 무덤이 새 무덤이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의심을 미리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무덤을 혼동했을지 몰라, 혹시 어떤 실수가 있었는지 몰라 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할까 봐 무덤이 새 무덤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덤 하면 나사로의 죽음이 생각 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밖에서 눈물을 흘리셨지만(11:35), 사람들이 돌을 굴렸을 때 썩는 냄새가 전혀 없었습니다(11:41). 요한은 독자들이 이것을 기억하면서 이런 메시지를 받아들일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을,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마지막 일곱째 날 안식을 하셨듯이 예수님도 그리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전체 주제는 새 창조입니다. 그러므로 여덟 째 날을 기다리라고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새 창조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그 새 창조의 세계에 이미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느끼고 못 느끼는 차이일 뿐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9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들은 새 창조의 혜택을 누릴 것이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어둠의 권세인 세상 권세에 눌려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사명은 이런 어둠의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나의 사명을 다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