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강해

[읽기 쉬운 창세기강해]#1. 1:1-2. "천지 창조"

이헌교 2025. 4. 24. 15:44

 

창세기는 처음을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그렇다고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듯 우주와 지구, 인류의 처음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전하는 책이라고 보는 것은 부적절합니다. 이 책은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에 처음 이야기가 생겨나 전해지고 기록되었기에 오늘날처럼 과학적으로 세상을 보는 시대가 아니라 세상 전체가 신와 연관되어 있고 천둥과 번개까지도 하늘에 있는 신들의 작용이라고 생각하던 시대가 배경입니다. 우리나라로 비교하면 삼국시대보다도 훨씬 더 오래전, 고조선 시대 중에서도 더 오래된 시대와 비슷한 시대인 셈입니다. 그래서 과학적 기준으로 판단하며 창세기를 읽으면 이 책이 말하고 싶은 내용을 거의 놓치고 말 것입니다. ‘역사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는 오래전 과거에 존재했던 사람과 일어났던 일을 다루고 있어서 역사를 다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어난 일을 최대한 정확히 전달하려는 취지의 역사를 생각하며 창세기를 읽는다면 창세기, 나아가서 구약성경, 신약성경하고는 잘 맞지 않습니다. 창세기와 창세기를 포함한 구약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증언하는 책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보시는지, 사람은 어떤 존재라고 설명하시는지, 그래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증언하며 격려하고 권면하는 책입니다. 이러한 증언을 하되 사람 마음의 내면세계를 성찰하며 추상적이고 철학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안에서 일어난 사건과 상황, 즉 역사를 배경으로 하여 증언합니다. 이를 함께 고려하면 창세기는 역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이 사랑하신 사람과 세상에 관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많은 나라에서도 창세기 1장과 같은 창조 설화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과 신화가 나눠지는 지점은 무엇일까요? 문학적 형식과 기본적인 내용에서는 성경과 신화를 구별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성경과 신화 모두 고대 사람들의 시각에서 세상과 현실, 사람을 이해하는 도구이며 세계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점에서 성경과 신화의 차이는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사람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성경은 그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의 역사와 현실 속에서 계속 존재했던 반면, 신화는 후대의 사람을 더 이상 설득해 낼 수 없었기에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져 오늘날에는 문헌적 가치로만 존재할 따름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경의 첫 구절로서, 하나님의 창조 활동의 시작을 묘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천지라는 말은 하늘과 땅을 의미합니다. 이는 서로 반대되는 의미를 가긴 어휘를 합성하여 전체를 의미하는 어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하는 천지는 하늘과 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의 충만한 유형무형의 모든 존재를 다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본문은 두 가지를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 태초에 하나님께서 존재하셨다는 것이며, 둘째, 그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창조란 의미로 사용한 히브리어는 바라입니다. 히브리어에서는 창조란 단어가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바라’, ‘야차르’, ‘아사이렇게 세 단어가 있는데 바라는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뭔가가 만들어진 것이며, 다른 두 단어는 기존의 재료를 사용해서, 어떤 것을 만들어 낼 때, 사용하는 단어 라고 합니다. 즉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태초란 단어는 시간의 시작을 의미하는 단어라고 합니다. 시간의 시작이란 말은 만물이 창조에 의해서 형태화된 바로 그 시점이 시간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질과 시간이 동시에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없이 물질이 있을 수 없고, 물질이 없이 시간이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존재가 소멸되면 그 존재는 시간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이란 것입니다. 그러니까 태초 전, 시간이 창조되기 전에는 물질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지 만물은 무에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시간 이전인 영원에는, 하나님 이외에 아무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빛이 하나님을 상징한다면 흑암은 반() 하나님적인 것을 상징합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는 것은 무의 황량한 상태, 혹은 두렵고 원시적인 상태를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계시의 순간에 자신을 흑암으로 가리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4:11, 18:12). 따라서 이 흑암은 하나님께서 감추어진 자신을 계시하려고 기다리시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주체며, 그의 창조 능력은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습니다(104:30). 하나님의 영은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그의 영을 거두실 때, 그 생명은 끝난다는 것입니다. 즉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물질인 육체를 벗어나게 되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 죽음의 순간은 시간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을 상실한다는 것은 이제 영원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시간을 벗어나는 그 순간 우리들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 혹은 영원한 지옥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추구하고 분투해야 할 삶은 그 영원을 바라보고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영원을 소망하면서 어떻게 하면 그 영원 속에서 천국에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가는 성경을 통해 알아야 하며 연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삶은 잠깐 있다가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면 충분히 그럴 힘이 생길 것입니다. 우리가 그 영원한 세계 속에서 입을 육신은 이 물질 속에서 입고 있는 이 육신과는 완전히 다른 육신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을 하셨을 때, 그 부활의 몸으로, 벽을 뚫고 들어오시고 동시에 여러 사람 앞에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즉 시간과 관계가 없는 모습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현재의 물질에 목숨을 거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삶을 바라보고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과연 영원한 삶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