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강해

[읽기 쉬운 창세기강해]#38. 12:10-20. "애굽으로 내려간 아브라함"

이헌교 2025. 7. 1. 16:09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의 애굽 이주 사건에 대한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지금껏 오직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며 가나안 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은 계속되는 극심한 기근을 당하여 그 상황을 자신의 생각과 방법으로 모면하고자 시도하다가 더욱 위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본문은 아브라함과 같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도 본래는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으로서 연약하여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를 위기에서 구원해 주셨는데 이는 택한 자를 끝까지 보살펴 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은총을 잘 보여 주는 것이라고 본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2:10,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나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당시 아브라함이 살던 팔레스타인에는 샘이나 강이 흔치 않았으므로 비 한 방울 없는 오랜 가뭄이 닥치면 극심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특히 당시 아브라함이 머물렀던 남방즉 네게브는 사막 지역으로서 원래부터 거친 땅이었으므로 이런 가뭄이 닥치면 많은 가축을 이끌고 유목 생활을 하던 아브라함에게는 생존 그 자체를 위협받는 큰 위기였을 것입니다. 또한 본문에서 거류하려고의 원어의 단어는 길에서 벗어나다란 의미가 있으며 이 단어는 주로 여행자로서 어떤 지역에 일시적으로 잠깐 동안만 머무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애굽에 정착하러 간 것이 아니라 가뭄이 끝나면 다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돌아올 것을 기약하고 내려간 것입니다. 한편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훗날 야곱의 가족이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는 사건을 예시하는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또한 유아를 살해하는 헤롯의 칼날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간 예수 그리스도를 내다본 것이기도 하다고 신약의 저자들은 생각했던 것입니다(2).

 12:11-13,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그 당시 고대 근동의 문화에는 여자를 빼앗기 위해 남편을 죽이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고육지책으로 사래에게 누이라고 말하라고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아브라함의 두 가지 큰 실책이 있습니다. 첫째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생각에 따른 것입니다. 둘째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한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으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기 위해서는 아직 자녀를 갖지 못한 그를 죽도록 내버려 두실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이 사실을 믿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이 죽임을 당할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우리 인간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평소에는 신앙심이 깊은 성도들도 막상 큰 고난이 닥치면 정신을 못 차리고 허둥대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럴 때 일수록 성도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4:20).

 12:14-16,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의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본문은 사래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당시 아브라함이 가졌던 재물에 대한 애굽 사람들의 관심이 사래의 육체적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에 못지않았을 것입니다. 즉 애굽 사람들은 가나안에서 이주한 부유한 족장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후에 애굽 왕 바로가 아브라함의 누이로 알았던 사래와 결혼하려 한 커다란 동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애굽 왕 바로는 자신의 정권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부족장의 여동생이나 딸과 정략결혼을 했기 때문에 그가 사래를 취하려 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15절에서 칭찬하다란 원어적 의미는 노래하다’, ‘찬양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합니다. 이로 보아 당시 바로의 대신들은 사래의 미모를 바로에게 마치 노래하듯이 아뢰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65세가 넘는 사래의 아름다움이 대신들에 의해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아마 당시 대신들은 사래의 아름다움도 바로에게 전했을 것이나 족장 아브라함과 친교를 맺는 것이 국익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16절은 보면 바로는 단순히 아브라함의 목숨을 보존해 준 데 머문 것이 아니라 사래의 오빠로 알려진 아브라함에게 많은 예물까지 주며 그의 호의를 사려했음이 분명합니다. 이는 신부를 취할 때 그 신부 가족에게 예물을 주는 고대 결혼 풍습에 따른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족장 아브라함과 친교를 맺으려는 정략적인 이유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아브라함은 아내를 팔아 자신의 안전을 지키며 거기에 부까지 획득하는 파렴치한 인간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질책이 이어집니다.

 12:17-20,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본문은 여호와의 보호로 아브라함이 위기에 벗어나는 내용입니다. 아마 하나님께서는 바로가 사래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그와 그의 가족들에게 심한 질병을 내리셨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바로는 이에 아브라함을 불러 꾸짖었습니다. 특별히 바로는 아브라함을 향하여 네가 어찌하여라는 말을 세 번씩이나 반복하면서 호되게 질책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가 신앙적인 방법을 버리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처신하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부끄러움과 멸시를 받게 된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마태복음 5:13에서는 마치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버려지게 되어 발에 밟히는 것과 같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인간적인 생각으로 애굽에 내려갔지만 하나님은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성경 저자는 이를 통해 독자들에게 무엇을 전하고 싶었을까? 결국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그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과 은혜가 함께 부어진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담대히 나아가라고 권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과연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 담대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