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히브리서강해]#16. 6:13-20. "하나님의 약속"
오늘 본문은 저가가 성도들에게 더 큰 소망의 근거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본받아야 할 가장 전형적인 인물로서 아브라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목적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유대 민족과 믿음의 아버지(요 8:39)인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의 신실함을 예로 들어 독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길을 계속 걸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 둘째는 아브라함으로부터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유대교와 기독교의 연속성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와 기독교가 아브라함과 유대교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13~16절까지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이 언급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6:13-14,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자신보다 더 큰 존재가 없으므로 자신을 두고 맹세하셨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맹세의 대상에 따라 그 맹세의 경중이 정해졌는데(마 5:34-36),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확실한지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약속은 창세기의 여러 곳에 언급되어 있지만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바치려고 했을 때 분명하게 주어졌던(창 22: 16-18)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를 통해 죄로부터 구원받게 될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와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 약속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갈 4:4). 본문에서 하나님은 “만약 내가 확실히 네게 복을 주지 않는다면, 내 이름이 영원히 먹칠을 당해도 좋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고, 그 뒤에 하나님은 정말 약속을 지키겠다고 맹세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둘 중 어느 하나도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런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독자들에게 권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6:15-16,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루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저자는 아브라함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다고 이야기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이 일시적으로나마 하나님을 불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현되었고 이스라엘의 불성실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의 믿음은 깨질 수 없는 약속을 주셨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6:17-18,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저자는 하나님이 둘 중 어느 것도 거짓말 하실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약속이 확실하고 안전하다고 여길 수 있고 그렇게 여겨야 하는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또 이것은 결국 희망을 붙들고 믿음 안에서 인내하라는 이전 본문의 권고 아래 놓여 있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의 믿음은 깨질 수 없는 약속을 주셨고 또 그 약속을 분명히 지키실 하나님을 신뢰하되,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계속 신뢰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희망은 이 약속에 따라 하나님이 세상을 새로 고치셔서,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시작하셨던 그 일을 완성하실 그때를 미리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 이야기를 날마다 그리고 해마다 계속 반복해 전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창조의 시대, 즉 오는 시대, 우리가 갈망하는 ’내세‘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들어가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희망인 것입니다.
6:19-20,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고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저자는”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닻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닻이 “휘장 안에 들어간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닻은 장막 뒤가 아니라 해저에 닿아야 하는데 저자는 왜 휘장 안에 있다고 할까? 저자가 말하는 닻은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핵심입니다. 저자는 지금 다음 장에서 설명할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개열을 따르는 대제사장이라는 말의 의미를 앞질러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자가 대제사장을 염두에 둔 만큼, 그는 성전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대제사장이 성전에서 하는 일을 염두에 둔 만큼 그의 사고는 당연히 1년에 한 번, 대제사장이 마지막 휘장 뒤에 있는 성전의 가장 안쪽 성소, 즉 ’지성소‘에 들어가는 위대한 순간까지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곳은 지상에서 가장 거룩한 장소,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곳,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 속죄하는 곳입니다.
저자가 앞으로 나올 본문에서 보다 자세하게 말하려는 내용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있는 지상의 성전이 아니라 하늘의 세계 자체인 참된 성소로, 곧장 지성소로, 그리고 사랑하는 아버지의 임재로 들어가셨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그곳에 가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에게 붙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닻처럼 하나님의 임재 안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놓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 닻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폭풍이 전혀 없을 거라는 약속을 받지 않았습니다. 사실 안전한 닻을 제공하는 것은 폭풍이 있을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약속은 우리가 안전하게 보호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난 두 단락의 당부, 곧 굳게 서서 인내로 붙들라는 당부 아래 놓여 있는 약속인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과연 그 약속을 굳게 서서 인내로 붙들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